사진=제미나이 생성
사진=제미나이 생성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언어생활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 외국어를 몰라도 실시간 번역으로 대화할 수 있고, 간단한 명령만 입력하면 AI가 이메일과 보고서를 대신 써준다. 생성형 AI를 상대로 외국어 회화를 연습하는 것도 가능하다. ‘AI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데 굳이 외국어를 배우고 글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할까’라는 질문이 나오는 이유다.

최근 한국을 찾아 한국경제신문가 인터뷰를 진행한 조지은 영국 옥스퍼드대 한국언어학 교수는 이런 질문에 “AI 시대일수록 오히려 언어교육이 더 중요해진다”고 답했다. 이어 “앞으로 언어를 잘하는 사람은 자기만의 언어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다. AI가 정답에 가까운 문장을 대신 만들어주는 만큼 인간에게는 무엇을 말할지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자기 목소리로 표현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해진다는 설명이다.

다중언어와 인간의 언어 습득 과정을 연구해온 조 교수는 2021년부터 옥스퍼드 영어사전(OED) 한국어 컨설턴트로 활동하며 ‘오빠’ ‘대박’ ‘해녀’ 등 한국어 단어의 사전 등재에 참여했다. 그는 AI 시대에 ‘자기 언어’를 만드는 핵심적인 방법으로 독서와 대화를 꼽았다. 단어와 문법을 잘게 쪼개 정답을 찾는 데 집중해온 한국의 외국어 교육도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지은 옥스퍼드대 교수가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문경덕 기자
조지은 옥스퍼드대 교수가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문경덕 기자
▷AI가 번역부터 작문까지 해주는 시대다. 외국어를 배워야 하나.

“언어의 역할이 정보 전달뿐이라면 AI에 상당 부분 맡길 수 있다. 하지만 언어에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 이상의 역할이 있다. 사람은 서로의 불완전한 언어에 끌린다. 말이 조금 빠르기도 하고 느리기도 하고, 때로는 서툴기도 한 인간의 목소리에서 위로를 받는다. 중요한 거래를 하거나 인간관계를 맺을 때도 결국 내 입으로 직접 말하는 과정에서 신뢰가 만들어진다. 말은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정체성과도 연결돼 있다. 언어를 모두 AI에 맡기기 어려운 이유다.”

▷AI 시대에 언어를 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AI와 공존하지 않고 살기는 어렵다. 중요한 것은 누가 주체가 되느냐다. 사람이 AI에 종속되지 않고 주체성을 가지려면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자기 언어가 있어야 한다.”

▷자신만의 언어는 어떻게 만들 수 있나.

“역사적으로 검증된 방법이 대화와 독서다. 무슨 말을 할지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경험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자기 목소리로 전달해야 한다. AI에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해?’라고 계속 물어보는 데 익숙해지면 AI가 없을 때 아무 말도 못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AI와 대화해도 새로운 표현을 접할 수 있다. 굳이 책을 읽어야 하나.

“책과 AI의 중요한 차이는 ‘멈춤’이다. AI는 수많은 언어와 문장을 계속 만들어낸다. 빠르게 받아들이고 흘려보내기 쉽다. 책은 읽다가 멈춰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고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에 책은 오히려 생각할 시간을 주는 플랫폼이다.”

▷단순히 책을 많이 읽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단순히 내용을 이해하는 단계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의미 만들기’다. 예를 들어 ‘몽글몽글’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뜻을 외웠다고 자기 언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 속에서 그 말을 만나고 어떤 장면과 감정을 표현하는지 상상하고 자신의 경험과 연결해야 한다. 다양한 문맥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있어야 자기 어휘가 된다. 대화가 필요한 이유다.”

▷한국의 영어교육은 단어·문법·독해 등을 나눠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은 언어를 쪼개서 배우지 않는다. 반드시 문맥이 필요하다. 대화에도 문맥이 있고 독서에도 문맥이 있다. 언어는 ‘상황이라는 그릇’ 안에서 배우는 것이다. 단어를 몇 개 외웠는지보다 어떤 상황과 맥락 속에서 그 말을 만났는지가 중요하다.”
조지은 옥스퍼드대 교수가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문경덕 기자
조지은 옥스퍼드대 교수가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문경덕 기자
▷한국인은 영어를 오래 공부하고도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영어와 시험이 너무 강하게 결합돼 있기 때문이다. 영어로 말하는 순간에도 평가받는다고 느낀다. 한국인은 영어를 굉장히 많이 배웠고 유능한데도 영어로 이야기할 때 ‘영어를 잘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 가운데 자기 영어 때문에 미안하다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이 정도 소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문법적으로 틀리는 데 대한 두려움도 큰 것 같다.

“대표적인 것이 3인칭 단수 ‘-s’다. 한국에서는 ‘-s’ 하나를 빠뜨리면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도 이런 실수를 한다. 중요한 것은 ‘-s’를 빠뜨렸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슨 말을 할 것인가’다. 지엽적인 문법의 늪에 빠져 있으면 영어 자신감을 갖기 어렵다. 문법적 오류를 지나치게 두려워하기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을 길러야 한다.”

▷영어는 일찍 시작할수록 좋은가.

“일찍 언어를 접하는 데 따른 장점은 있다. 어린아이들은 ‘내가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사회적 불안이 상대적으로 적다. 틀려도 일단 말한다. 하지만 언제 시작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어를 어떻게 처음 만나느냐다. 조금 늦게 시작하더라도 쉽고 재미있게 만나면 영어가 아이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내재화될 수 있다.”

▷영어유치원을 보내는 부모들이 고민할 만한 대목이다.

“영어유치원 자체가 좋다, 나쁘다고 단정할 문제는 아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가장 적절하고 편안한 방법을 각각 찾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영어와의 ‘첫 만남’이다. 처음부터 영어를 어렵고 무서운 대상으로 만나 외국어 불안이 생기면 이후에도 영어에 대한 반감이 남을 수 있다.”

▷영어유치원 입학을 위해 어린아이에게 시험을 준비시키는 경우도 있다.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영어를 시험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물론 학교에 입학하면 결국 영어 시험을 보게 된다. 하지만 영어와의 첫 만남이 시험이어서는 안 된다. 처음에는 ‘영어는 재미있고 즐거운 것’이라고 느끼게 해줘야 한다. 한국에서는 ‘즐겁고 재미있게 시작하자’는 메시지보다 ‘빨리, 일찍 시작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지나치게 강하다.”

▷평가를 피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영어에 대한 흥미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좋아하는 것에 영어를 입히면 된다. 언어 학습에서 ‘즐거움’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 좋아하는 가수나 캐릭터가 있다면 관련된 영어 콘텐츠를 찾아보게 하는 식이다. 언어를 공부한다고 의식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접하는 ‘암묵적 학습’이 일어날 수 있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커뮤니티를 만들어 함께하는 것도 좋다. 좋아하는 것은 오래간다.”

이미경 기자 capit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