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 자잔 주 지잔에 있는 아람코 석유 시설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다. 사진=REUTERS
사우디아라비아 자잔 주 지잔에 있는 아람코 석유 시설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다. 사진=REUTERS
미국이 이란전쟁으로 파괴된 중동 에너지 시설을 복구하고 호르무즈 해협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50억달러를 출자하는 재건기금을 제안했다. 전쟁이 끝나도 파이프라인과 정유시설 피해가 원유·가스 공급과 운송비를 계속 압박할 수 있다고 보고 대체 수송망 구축까지 지원하겠다는 구상이다.

22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이 50억달러를 내고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UAE)·카타르·바레인·쿠웨이트·오만·이라크·요르단 등 중동 8개 협력국에서 같은 금액을 모아 총 100억달러 규모의 기금을 조성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기금 명칭은 ‘동맹 신뢰·건설 파트너십(Pact)’으로 정해졌으며 미 국제개발금융공사(DFC)가 운용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DFC는 민간 자본과 함께 미국의 국가안보 정책을 지원하는 연방기관이다. 그동안 개발도상국 투자가 주력이었던 만큼 부유한 걸프 산유국의 기반시설 재건을 맡는 것은 이례적이다. 다만 협의가 진행 중이기에 출자 조건과 참여국은 바뀔 수 있다.

미국이 재건기금을 추진하는 것은 7개월간 이어진 전쟁으로 중동의 파이프라인과 정유시설, 천연가스 수출 터미널 수십 곳이 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에너지 전문가와 당국자들은 시설 복구에 필요한 설계·건설·장비 비용이 수백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시설 파괴는 이미 물류비 상승으로 번지고 있다. 이달 드론 공격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호르무즈 우회 파이프라인이 멈추면서 더 많은 원유가 해협으로 몰렸다. 우회 운항과 해협 주변의 반복적인 단거리 운송으로 선박이 묶이면서 유조선 하루 임대료도 사상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걸프 산유국들은 호르무즈를 거치지 않고 원유를 수출할 노선을 서둘러 늘리고 있다. 그러나 우회로를 이용하려면 더 많은 유조선이 필요해 오히려 운임을 밀어 올릴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대체 노선을 가동하고도 병목을 충분히 풀지 못해 원유 생산량이 수십 년 만의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미국의 구상은 피해 시설을 원상 복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호르무즈 해협에 의존하는 중동의 원유·가스 수출 구조를 바꾸는 데 초점을 맞춘다. 우메르 카림 영국 버밍엄대 연구원은 "걸프 국가와 이라크에서 호르무즈의 위상이 단기간에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인식이 커졌다"며 "안정적인 우회 통로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참여국의 이해관계는 엇갈린다. 사우디아라비아와 UAE는 대체 수송로를 활용할 여지가 크지만, 쿠웨이트와 카타르는 여전히 호르무즈 해협 의존도가 높다. 일부 중동 당국자는 이번 구상이 호르무즈의 중요성을 낮추는 동시에 이란에 맞선 미국과 동맹국의 결속을 보여주려는 성격도 있다고 평가했다. 이란과 평화협정을 맺지 않은 상태에서 새 시설을 지어도 다시 미사일이나 드론 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수송망이 다른 국가의 영토와 시설을 거치면 새로운 의존관계가 생기는 것도 부담이다. 카림 연구원은 이런 구조가 국가 간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어 사업 추진을 어렵게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제안한 Pact가 출범하려면 참여국의 출자 합의가 필요하다. 또한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고 호르무즈를 우회할 안전한 수송로를 얼마나 빨리 확보하느냐에 따라 중동 에너지 시장의 정상화 속도도 좌우할 전망이다.

오세성 기자 ses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