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왼쪽)과 김원경 삼성전자 글로벌퍼블릭어페어스(GPA)실 사장. 사진= 히라키 다이사쿠 위원장 측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왼쪽)과 김원경 삼성전자 글로벌퍼블릭어페어스(GPA)실 사장. 사진= 히라키 다이사쿠 위원장 측
"일본 전역을 살펴보고 있다. 전력과 용수가 풍부한 곳이라면 어디든 고려하고 있다."(최태원 SK그룹 회장)

"한국과 일본 기술 교류를 가속화해 차세대 패키징 산업을 함께 성장하는 원동력으로 삼겠다."(전영현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장(부회장))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요 경영진이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최근 일본을 눈여겨보며 한 말이다.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는 두 회사는 과거 반도체 강국인 일본과 '밀착 협업'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최 회장이 차세대 반도체 생산 기지 후보군으로 일본을 언급한 데 이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일본 정계와 만나 양국 협력 방안을 논의하면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사진=연합뉴스
최태원 SK그룹 회장. 사진=연합뉴스

일본의 탄탄한 '소부장 경쟁력'


일본은 1980년대 한국을 앞서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선도한 국가다. 일본전기(NEC)와 도시바, 후지쓰, 히타치 제작소 등의 기업은 기술 경쟁력과 낮은 가격을 무기로 전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 80%를 차지했다. 1986년에는 NEC가 전통 강호인 미국 텍사스인스투르먼트(TI)를 꺾고 전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에 오를 정도였다. 이듬해 전 세계 반도체 10대 기업 중 5곳에 일본 기업이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몰락의 순간도 빨랐다. 미국 기업들이 일본 반도체 기업을 반덤핑 혐의로 제소했고, 미국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일본에 보복관세를 부과하면서다. 미국과 일본은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약'을 맺고 일본 내 미국 반도체 기업의 시장 점유율을 20%까지 높이도록 했다. 삼성전자·현대반도체 등 한국 기업은 가격과 생산능력을 앞세워 일본이 휘청이던 시기 빈틈을 노려 굴기에 성공했다. 1992년 삼성전자가 전 세계 D램 분야 1위에 오른 것이 단적인 사례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업계 주도권을 내준 일본의 뒷배가 된 건 탄탄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경쟁력이다. 일본 반도체가 디자인과 웨이퍼 제조, 테스트 등을 한 회사가 도맡는 수직계열화 방식을 고집한 덕택이다.

신에츠화학과 도쿄일렉트론, 디스코 등 일본 소부장 업체들은 도시바와 히타치의 양산 라인에서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수율 노하우를 익혔다. 실적 압박 없이 연구개발(R&D)에 매달리면서 이들은 고난도 화학 및 정밀가공 원천기술을 확보했다. 반도체 절삭 전문 기업 디스코가 웨이퍼 절단(다이싱) 분야 전 세계 점유율 80%를 차지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일본에 주목한 이유로 '소부장 생태계'를 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영현 삼성전자 DS부문장(부회장·왼쪽에서 세 번째). 사진=니혼게이자이 신문
전영현 삼성전자 DS부문장(부회장·왼쪽에서 세 번째). 사진=니혼게이자이 신문
삼성전자는 지난 8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어드밴스드 패키지 랩(APL) 개소식을 열었다. 실제 반도체 제조 환경과 비슷하게 장비를 돌리는 클린룸을 마련한 게 특징이다. 개소식에는 도쿄일렉트론과 이비덴 등 일본 주요 반도체 소부장 업체 15곳이 참여했다. 업계 관계자는 "요코하마는 핵심 소부장 회사들의 본사가 있는 도쿄 및 수도권을 1시간 이내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SK하이닉스 일본 공장 부지 후보로 거론되는 미야기현은 규슈, 홋카이도와 함께 일본 정부가 반도체 재건 '3대 축'으로 육성하는 도호쿠 지역의 중심지다. 도쿄일렉트론의 핵심 자회사인 식각 장비회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세계 2위 실리콘 웨이퍼 제조사 섬코(SUMCO)가 인접해 있는 데다 반도체용 특수 화학소재 및 가스 조달이 용이하다. 앞서 대만 파운드리 업체 PSMC와 SBI홀딩스는 2023년 현지 공장 설립을 검토하기도 했다.

반도체 팹 핵심 인프라도 풍부

실리콘 웨이퍼. 사진=연합뉴스
실리콘 웨이퍼. 사진=연합뉴스
반도체 팹을 짓기 위한 인프라가 안정적인 점도 일본이 '핵심 거점'으로 떠오르는 이유 중 하나다. 통상 팹을 짓기 위한 핵심 인프라로는 전력과 용수, 부지, 인력이 꼽힌다.

일본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작동을 멈춘 원자력발전소를 최근 들어 순차적으로 가동해 전력 생산을 끌어올리고 있다. 반도체 주요 거점 중 하나인 규슈에는 센다이 원전 1·2호기, 겐카이 원전 3·4호기를 돌리고 있다. 화력과 수력, 태양광 에너지 설비도 잘 갖춰져 있다. 이곳은 원전과 태양광만으로 봄과 가을철 도심 전체 전력 수요의 100%를 충당할 정도로 전기가 남아도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도호쿠는 지역 소비량 대비 발전 여력이 넉넉해 도쿄 등 수도권 일대로 전기를 보내는 지역으로 통한다. 오나가와 원전 2호기가 지난 6월 상업 운전을 재개하는 등 기저 전력 공급 능력도 강화하는 곳이기도 하다.
일본 오나가와 원전. 사진=연합뉴스
일본 오나가와 원전. 사진=연합뉴스
규슈와 도호쿠는 용수 및 부지도 잘 갖춰져 있다. TSMC가 있는 규슈 구마모토 공장은 화산 지형인 아소산이 자리 잡고 있어 지하수가 풍부한 편이다. 도호쿠 미야기현은 동북 지방의 대동맥이라고 불리는 기타카미강을 비롯해 아부쿠마강, 나루세강 등이 밀집해 있어 유량이 풍부하다. 지역 거점 국립대에서 유수한 반도체 인재를 빠르게 확보할 수 있는 것도 두 지역의 장점이다.

정부도 나서서 글로벌 반도체 기업을 적극 유치하고 있다. 한 예로 구마모토현은 TSMC 팹 신설을 위해 '반도체산업 집적 강화 추진 본부'를 구성해 각종 행정 절차를 원스톱으로 해결했다. TSMC 팹 건설에 28개월밖에 걸리지 않은 핵심 배경 중 하나다. 마이크론은 정부 지원에 힘입어 히로시마에 첨단 메모리 팹을 건설하고 있다.
TSMC 구마모토 공장. 사진=연합뉴스
TSMC 구마모토 공장. 사진=연합뉴스
성과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TSMC, 마이크론 등 외국 반도체 기업의 대일 투자 규모는 6조엔(약 53조3000억원)에 달했다.

양국간 시너지 효과 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미국의 반도체 투자 압박과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맞물리면서 이를 극복할 현실적인 대안이 일본이라는 관점도 있다. 특정 국가나 국내에 단일 거점에 생산능력을 집중하는 것이 지정학적 리스크를 키운다는 이유에서다. 일본은 한국과 지리 및 물류적으로 인접한 우방국으로 한국과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의미다.

최 회장은 지난 8월 공개된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이 하나로 뭉치면 약 6조달러 규모, 세계 4위 경제권을 형성할 수 있어 더 강력한 교섭력과 발언권을 확보할 수 있다"며 "동시에 유럽연합(EU) 솅겐 협정처럼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들어 중국이 막대한 자금을 앞세워 기술 경쟁력을 갖춘 일본 소부장 기업을 인수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며 "한국이 반도체산업의 패권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일본과의 전략적 협업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원종환 기자 won040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