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 그로펠리 커넥트유럽 사무총장(오른쪽)과 마리 파로비르타 부사무총장(왼쪽)이 지난 7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 커넥트유럽 사무실에서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라현진 기자
알렉산드로 그로펠리 커넥트유럽 사무총장(오른쪽)과 마리 파로비르타 부사무총장(왼쪽)이 지난 7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 커넥트유럽 사무실에서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라현진 기자
“인공지능(AI)과 AI 전환(AX) 시대가 열렸지만 이에 필수적인 5G 단독모드(SA) 및 네트워크 슬라이싱 투자는 규제의 벽에 막혀 있습니다.”

커넥트유럽의 알렉산드로 그로펠리 사무총장과 마리 파로비르타 부사무총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5G SA 상용화와 네트워크 슬라이싱 도입을 둘러싼 글로벌 규제 현주소를 이같이 진단했다.

커넥트유럽은 도이치텔레콤, 보다폰, 텔레포니카 등 유럽 주요 통신사들을 대변하는 통신협회다. 이들은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망 중립성’ 원칙의 경직된 적용이 AI 통신 인프라 투자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망 중립성은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ISP)가 모든 데이터 트래픽을 내용, 유형, 제공자 등에 관계 없이 동등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초기 인터넷 시기에 콘텐츠 사업자를 보호하기 위해 확립된 개념이지만, 유튜브, 넷플릭스 등 콘텐츠 사업자가 ‘갑’이 된 현재도 획일적으로 적용된다는 비판도 받는다.

◇“네트워크슬라이싱, 망 중립성 예외”

"5G 시대 가로막는 '망 중립' 규제…통신 고속도로 빗장 풀어야"
통신업계가 5G SA 고도화의 핵심으로 꼽는 네트워크 슬라이싱은 하나의 물리적 이동통신망을 가상으로 분리하는 기술이다. 서비스 특성에 맞춰 초저지연·대용량 등 ‘맞춤형 품질’(QoS)을 구현한다.

그러나 한국과 유럽을 포함한 글로벌 통신사들은 기술 개발을 완료하고도 대규모 투자를 망설이고 있다. 각국 규제 당국이 네트워크 슬라이싱을 망 중립성 위반으로 볼지, 예외가 인정되는 특수서비스로 인정할지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해서다.

파로비르타 부사무총장은 “핀란드처럼 슬라이싱 기반 B2B 서비스 개발이 활발한 곳이 있는 반면, 일부 국가에선 공항 전용 슬라이싱 구축조차 일반 이용자 트래픽 품질을 저해할 수 있다는 엄격한 해석에 막혀 무산되기도 했다”며 국가별·당국별 규제 파편화 문제를 지적했다.

이들은 특히 AI 트래픽이 통신망 생태계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고 짚었다. 그로펠리 사무총장은 “AI 데이터센터와 대규모언어모델(LLM) 등으로 트래픽이 폭발하고 있지만, 망을 구축하는 주체와 트래픽으로 수익을 올리는 주체가 다른 경제적 불균형이 지속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일반 이용자의 인터넷 접근권을 보장하는 망 중립성 원칙을 훼손하자는 것이 아니다”라며 “특수 목적으로 제공되는 B2B·산업용 네트워크 슬라이싱 서비스는 일반 인터넷과 분리된 영역으로 명확히 규정해 법적 확실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글로벌 통신정책 전문가인 로슬린 레이턴 스트란트컨설트 부대표는 기자와 만나 “모든 트래픽을 똑같이 취급해야 한다는 생각은 넌센스”라며 “낮은 지연시간과 높은 신뢰성을 제공하는 전용 슬라이스는 일반 인터넷과 다른 서비스이며, 규제 기관은 일반 인터넷 품질을 떨어뜨리거나 경쟁 서비스를 차별할 때 개입하면 된다”고 강했다.

◇AI 시대 ‘품질 기반 과금’ 확립돼야

글로벌 시장에서 네트워크 슬라이싱이 주목받는 이유는 데이터 용량·속도 중심이었던 통신사의 수익 모델을 지연시간·신뢰성·보안 등 ‘망의 품질’ 기반으로 다변화할 수 있어서다. 포천비즈니스인사이트에 따르면 세계 5G 네트워크 슬라이싱 시장은 지난해 6억2522만달러에서 2034년 163억744만달러로 약 26배 성장할 전망이다.

실제 국내외 통신사들은 기술 상용화 및 적용 영역 확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KT가 상용 스마트폰에서 업무용 앱(기업망)과 개인용 앱(일반 인터넷망)을 서로 다른 네트워크 슬라이스로 분리해 처리하는 ‘앱 슬라이싱’ 검증이 진행 중이다. 5G 표준 기술인 ‘URSP’를 통해 스마트폰이 앱 식별 정보별로 최적의 전송 경로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해외에서도 빅테크와의 망 사용료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 망 품질 차등화 상품을 통한 비용 회수 움직임이 뚜렷하다. 도이치텔레콤의 ‘5G+ 울트라’, 보다폰의 ‘5G+ 로컬 슬라이싱’, 영국 EE의 ‘패스트 래인’ 등 혼잡 상황에서도 품질을 보장하는 슬라이싱 상품이 잇따라 상용화됐다.

한국 정부와 통신업계도 제도 정비와 인프라 투자 확대를 위해 손을 잡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통신 3사와 함께 ‘AI 시대 통신망 투자 촉진을 위한 민·관 협의체’를 발족했다. 국내 통신 3사의 설비투자액이 2019년 9조6000억원에서 지난해 6조200억원까지 감소함에 따라 차세대 망 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조치다.

네트워크 슬라이싱

하나의 5G 물리적 통신망을 다수의 독립된 가상 네트워크로 쪼개 제공하는 기술. 트래픽 폭증 시에도 특정 기업이나 서비스에 버스전용차로처럼 전용 통신로를 보장한다.

브뤼셀=라현진 기자 raralan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