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전시 작품 제작을 위해 선발된 학생들이 솔 르윗이 남긴 지시문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모습. /르윗재단 및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
지난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전시 작품 제작을 위해 선발된 학생들이 솔 르윗이 남긴 지시문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모습. /르윗재단 및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
이게 다 뭔가. 이것도 작품인가. 나도 하겠다. 지금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미술 거장 솔 르윗(1928~2007)의 개인전을 찾은 관객 중에서는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많다. 전시장 곳곳에는 갖가지 선과 도형을 그린 벽화들이 나와 있다. 모두 지난달 그린 작품이라는 게 미술관 설명이다. 작가는 19년 전에 별세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전시장을 둘러볼수록 의문은 커진다.

르윗은 ‘현대미술은 어렵다’는 통념의 주범으로 꼽히는 ‘개념미술’을 창시한 작가다. 이번 전시에는 45점의 작품이 나왔다. 개념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의 국내 첫 대규모 전시인 만큼, 개념미술이 대체 무엇인지를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전시 내용과 작품의 의미를 문답식으로 정리했다.

르윗은 누구인가

솔 르윗
솔 르윗
1928년 미국 하트퍼드에서 태어난 르윗은 시러큐스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뒤 군대에 입대했다. 6·25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귀국해 건축 거장 아이엠페이의 사무실 직원, 뉴욕현대미술관(MoMA) 경비원, 뉴욕대 강사 등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르윗은 벽에 그림을 그리는 대신 노트에 글을 써서 현대미술의 전설이 됐다. ‘어디에 어떤 선을 어떤 색으로 그으라’는 문장, 즉 지시문이다. 이를 다른 사람이 읽고 벽에 옮겼을 때 작품이 된다. 실제 그림이나 조각 없이 ‘개념’만으로 성립하는 예술이라서 ‘개념미술’이라 불린다. 그가 이런 방식의 작품을 처음 발표한 건 1968년 뉴욕의 폴라쿠퍼갤러리에서였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약 1350점의 지시문을 남겼다.

이것도 작품인가

솔 르윗의 조형 작품 ‘구조(사각으로서의 하나, 둘, 셋, 넷, 다섯)’.
솔 르윗의 조형 작품 ‘구조(사각으로서의 하나, 둘, 셋, 넷, 다섯)’.
“아이디어가 예술을 만드는 기계가 된다.” 르윗이 1967년 발표한 ‘개념미술에 관한 단락들’이라는 글의 한 구절이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의외로 이런 식의 예술 작품은 우리 주변에 흔하다. 예를 들어 음악가들은 지금도 수백 년 전 베토벤이 쓴 악보를 그대로 연주한다. 연주자가 누구든 이 음악은 베토벤이 창작한 것이다. 사실 미술에서 ‘작가의 손이 직접 닿아야 한다’는 규칙은 존재한 적이 없다. 루벤스는 공방을 차려 조수들과 일을 나눴고, 때로는 모든 과정을 다 맡긴 뒤 서명만 했다. 미켈란젤로는 성 베드로 대성당 돔을 설계했을 뿐 벽돌 한 장 쌓지 않았다.

이번 전시에 나온 벽화 13점은 지난달 5일부터 27일까지 국내 미술 전공 학생 23명이 그린 것이다. 뉴욕 르윗재단 직원 7명이 과정을 감독했다. 벽마다 옆에 붙은 설명판에는 그린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들이 동참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완성된 작품은 르윗의 작품이다.

뭘 보라는 건가

2004년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선보인 솔 르윗의 월 드로잉 작품. /테이트 제공
2004년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선보인 솔 르윗의 월 드로잉 작품. /테이트 제공
전시장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작품은 검은 벽에 흰 곡선 수십 개가 흩어져 있는 벽 드로잉이다. 오른쪽에는 그 드로잉의 규칙 몇 가지가 적혀 있다. 알파벳 스물여섯 자로 모든 단어를 쓸 수 있듯, 르윗은 기본 단위 몇 개와 규칙만으로 벽을 채웠다. 그 규칙을 생각하며 작품을 보는 게 감상법이다. 개념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퍼즐을 풀거나 추리소설을 읽을 때의 재미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한다.

1966년작 조형 작품 ‘시리얼 프로젝트 I(ABCD)’, 노란 벽에 기울어진 상자들을 그린 ‘잉크 워시 벽화’ 등도 마찬가지로 각자의 규칙이 있다.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만든 작품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조화와 비례가 주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애호가들의 설명이다.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지 않나

윤지은 큐레이터가 솔 르윗의 월 드로잉을 제작하는 규칙을 설명하고 있다. /성수영 기자
윤지은 큐레이터가 솔 르윗의 월 드로잉을 제작하는 규칙을 설명하고 있다. /성수영 기자
반은 맞다. 전시를 기획한 윤지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큐레이터가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로 꼽은 ‘월 드로잉 #797’(1995)은 누구나 제작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작품을 완성하는 방식은 이렇다. 첫 사람이 검은 마커로 벽 맨 위에 가로선을 하나 긋는다. 다음 사람이 빨간 마커로 그 바로 밑에 따라 그린다. 그다음은 노랑, 그다음은 파랑, 다시 빨강이다. 맨 아래 선이 벽 바닥에 닿으면 끝이다. 귓속말로 말을 전달하는 게임처럼 아래로 갈수록 모양이 처음 선과 딴판이 된다. 일종의 몸으로 하는 게임 같은 작품으로, 누구나 할 수 있다.

반은 틀리다. 현대미술의 주요 장르 중 하나인 개념미술이라는 것은 르윗이 창시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르윗 이전에는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했다. 다른 창작 분야와 마찬가지로 미술에서는 남과 다른 생각을 처음으로 고안해낸 작가를 높이 평가한다.

그의 작업 방식도 실제로 해보면 생각보다 어렵다. 어려운 건 선을 긋는 게 아니라 문장을 쓰는 것이다. 예컨대 르윗이 1971년에 쓴 ‘월 드로잉 #118’의 지시문은 간단하다. “벽에 연필로 점 50개를 고르게 찍고 모든 점을 직선으로 서로 이어라.” 하지만 이 문장을 읽고 결과가 어떤 모양일지 머릿속에 그리는 건 쉽지 않다. 그 결과 서로 다른 작품이 나온다. 문장이 너무 자세하면 결과가 뻔해지고, 너무 느슨하면 의도와 다른 엉망진창의 작품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이게 예술인가

이게 예술이냐는 질문은 보통 네 개의 질문이 합쳐진 것이다. 작품이 예술의 범주에 드는가, 좋은 예술인가, 비싼 값을 받을 만한가, 내 취향인가. 설명 없이도 이해하고 감동받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미술계 규칙에 따르면 르윗의 작품은 예술이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뒤샹이 1917년 소변기에 ‘예술품’이라는 딱지를 붙인 뒤 미술은 ‘솜씨 경연대회’에서 ‘아이디어 게임’으로 바뀌었다. 독창성이라는 측면에서 르윗의 작품은 탁월한 예술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뒤쪽의 두 질문은 각자 판단할 몫이다. 르윗 작품의 경매 최고가는 2023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기록한 163만3000달러(약 22억원)다. 모네의 ‘수련’이 1000억원 넘는 값에 낙찰되는 것을 감안하면, 현대미술에서 르윗이 차지하는 위상에 비해서는 높지 않은 편이다. 작가의 손이 닿지 않았기에 그렇다. ‘내 취향인가’는 직접 작품을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다. 전시는 내년 2월 28일까지, 성인 입장료 1만8000원.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