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가 분양가 부풀려 대출 받아
국민·신한·우리·기업銀 등 피해
"허술한 은행 심사망 개선 필요"
인천의 미분양 상가를 시행한 A사는 2023년 한 대출 브로커로부터 솔깃한 얘기를 들었다. 브로커가 수분양자를 동원해 미분양 물량을 모두 털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이들은 실제 거래액보다 높은 가격으로 분양한 것처럼 서류를 꾸며 대출금을 부풀렸다. 시행사는 약속된 매각 대금을 챙겼고, 남은 대출금은 브로커와 수분양자가 수수료 명목으로 나눠 가졌다.
이런 이면 계약의 피해자는 분양 대금 이상으로 대출해준 은행이었다. 국민·신한·우리·기업은행 등이 모두 농락당하면서 금융권 피해 규모는 1000억원을 훌쩍 넘어섰다. 단순한 부동산 대출 사기에 은행 심사 시스템은 속수무책이었다. 갈수록 고도화하는 수법에 비해 허술한 은행 심사망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사기에 취약한 상업용 부동산
31일 박성훈 국민의힘 의원실 등에 따르면 주요 은행과 상호금융권에서 발생한 이면 계약 부동산 대출 금융사고액은 총 1091억1000만원(136건)인 것으로 집계됐다. 은행권에서는 기업은행(182억2000만원)과 신한은행(173억4000만원)의 피해 규모가 컸다. 우리은행(98억7000만원)과 국민은행(35억8000만원) 등도 수십억원의 피해를 봤다. 상호금융권에서는 지역농협의 사고액이 481억9000만원으로 가장 많았다. 수협과 산림조합도 각각 58억7000만원, 34억6000만원의 금융사고를 냈다. 지난 12일 관련 금융사고를 공시한 국민·신한·우리·기업은행뿐 아니라 사실상 전 은행권이 이번 대출 사기에 피해를 본 셈이다.
이번 금융사고는 인천경찰청이 시행사와 브로커, 수분양자 등이 조직적으로 연계해 은행권 대출의 허점을 악용한 정황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2023년부터 지난해까지 거래된 인천, 경기 부천, 일산, 하남 등 수도권 미분양 상가와 지식산업센터가 범죄 대상이었다.
수법은 간단했다. 실제 거래가보다 높은 가격을 적은 계약서를 제출해 대출금을 부풀리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미분양 상가를 5억원에 분양하면서 은행에는 10억원 기준으로 작성한 이면 계약서를 제출했다. 부풀려진 대출금(6억~8억원)이 나오면 시행사는 약속한 돈만 가져가고, 차액은 브로커와 수분양자가 수수료로 챙겼다.
다만 이 피해액이 그대로 은행 손실로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부동산이 담보로 설정돼 있어 실제 손실액은 공시액보다 줄어들 수 있다. 은행 관계자는 “경찰 조사가 마무리되면 담보물 매각 등으로 대출금 회수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 외부 금융사기 급증
은행들은 대출 심사를 엄격히 해도 조직적인 대출 사기는 모두 걸러내기 어렵다고 설명한다. 대출 계약서와 입금 내역, 차주의 소득 증빙을 확인하고 감정평가사 등을 통한 현장실사를 거쳐도 이면계약 여부를 숨기면 구체적인 현금 흐름을 밝혀낼 수 없다는 얘기다.
지난해 도입된 ‘책무구조도’도 한계를 드러냈다. 책무구조도는 내부통제 책임을 명확히 하는 제도다. 임직원의 내부 횡령을 막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외부 사기를 판별하는 과정에서는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외부 금융 사기가 급증하는 추세다. 박성훈 의원실에 따르면 국민·신한·하나·우리 등 4대 은행에서 지난해 발생한 외부 사기 관련 금융사고는 61건으로 집계됐다. 전년(12건) 대비 다섯 배 이상으로 늘었다. 올해도 26건(7월 말 기준)의 외부 금융사고가 발생했다. 전체 사고 가운데 외부 금융사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86.7%로 치솟았다.
사고 유형도 다양해지고 있다. 산업은행은 지난 6일 외부인 사기로 583억원의 금융사고가 났다고 공시했다. 기업·하나은행에서도 동일 거래처 관련 내용으로 각각 94억원, 24억원의 금융사고가 발생했다.
수법이 지능화하는 만큼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박 의원은 “‘사후약방문’식 대응으로는 금융사기를 막을 수 없다”며 “서류 위조와 공모 정황조차 걸러내지 못하는 허술한 여신심사 시스템을 원점에서 뜯어고쳐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