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로앤비즈의 'Law Street' 칼럼은 기업과 개인에게 실용적인 법률 지식을 제공합니다. 전문 변호사들이 조세, 상속, 노동, 공정거래, M&A, 금융 등 다양한 분야의 법률 이슈를 다루며, 주요 판결 분석도 제공합니다.
AI 생성 이미지. 출처: 제미나이
AI 생성 이미지. 출처: 제미나이
국제중재 사건을 제기 당한 기업들. 즉, 피신청인 기업의 생각보다 적지 않은 수가 ‘잠적’을 택한다. 그 선택이 의도했던 전략이 아니라도 말이다.

국제중재 절차에 응하지 않는 현상은 여러 단계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중재기관의 공문이 도착해도 무시하고, 기한이 지나도 답변서를 내지 않으며, 중재인 지명 권한을 포기하기도 하며, 심리에도 출석하지 않고, 판정문 수령을 거부하기도 한다.

이들의 생각 한 구석에는 ‘어차피 법적 구속력이 없겠지’, 혹은 ‘어디서 판정이 나오든 집행이 되겠어?’라는 국제중재제도에 대한 무지 혹은 무관심이 자리잡고 있다. 반면에 이처럼 상대방이 대응조차 하지 않으니, 중재를 신청해도 소용없다는 이유로 애당초 사건 제기를 포기하는 신청인도 있다.

캐치 미 이프 유 캔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국내 에너지 관련 기업 A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등록된 B사와 원자재 공급계약을 체결하고 선급금을 지급했다. B사는 끝내 납품을 이행하지 않았다. A사는 선급금 회수와 손해배상을 청구하며 국제중재사건을 제기했다.

B사의 법인 뒤에는 실질적 1인 주주이자 대표인 C가 있었다. A사는 처음부터 법인만이 아닌 C 개인도 복수 피신청인으로 포함시켰다. 법인이 사실상 C 개인의 도구로 운용됐다고 볼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선택은 나중에 결정적 의미를 갖게 된다.

중재 절차에서 ‘송달’은 단순한 우편 문제가 아니다. 피신청인이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적법하게 통보 받았는지가 이후 판정의 유효성, 그리고 궁극적으로 집행 가능성을 좌우한다.

중재기관이 중재 신청서를 B사의 캘리포니아 등록 사무소 주소로 발송했을 때, 서류는 그대로 반송됐다. 해당 주소에 B사라는 법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A사는 그나마 C 개인의 거주지 주소를 파악하고 있었고, 이를 중재기관에 제공했다. 덕분에 중재 신청서는 C의 자택 주소지로 다시 발송됐고, 이번에는 정상적으로 수령됐다. 피신청인이 절차가 시작됐음을 인지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후가 문제였다. C는 아무런 회신이 없었고, 주요 절차에 불참했다. 하물며 신청인, 중재기관, 중재판정부가 C의 자택으로 보낸 주요 통지들은 모두 반송됐다. C가 해당 주소지에 더 이상 거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사 사실도, 새 주소도 알리지 않은 채 사라진 것이다. 그래도 절차는 진행됐고, 판정은 내려졌다

여기서 중요한 건 피신청인의 잠적이 절차를 멈추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중재판정부는 피신청인이 중재 신청서를 C의 자택 주소로 적법하게 수령했다는 사실을 이미 확인했기 때문에, 이후 서류 전달에 문제가 생겼다 해도 최초 송달이 이미 이뤄진 이상 피신청인은 절차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주소를 바꾸고 연락을 끊은 것은 피신청인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답변서는 끝내 제출되지 않았다. 심리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떤 서류도, 어떤 의견도 없었다. 중재판정부는 신청인이 제출한 자료만을 바탕으로 심리를 마무리하고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은 신청인에게 전부 유리했고, 중재비용 역시 전액 피신청인 부담으로 결정됐으며 다음과 같이 판시했다.

“피신청인들은 중재판정부의 의견 제출 요청에 불응하거나 기한을 준수하지 않았으며, 이 사건 중재절차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분쟁의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는 데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법인격 부인론도 인정됐다. 법인이 특정 개인의 도구로 남용된 경우 그 개인에게도 법적 책임을 묻는다. B사가 C 개인의 지배 아래 독립적 실체 없이 운용됐다고 판단된 것이다. 법인 명의로 계약했다고 해서 개인이 언제나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다. C는 B사와 연대하여 판정금 전액을 부담하게 됐다.

국제중재판정은 국경을 넘어 집행된다

출처: 생성형AI
출처: 생성형AI
이 지점에서 신청인 측이 가질 수 있는 현실적 의문이 있다. ‘상대방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고, 서류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는데, 이 판정이 진짜로 집행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국제중재 실무와 협약이 제공하는 답은 명확하다. 1958년 체결된 뉴욕협약은 현재 170개국 이상이 가입해 있으며, 협약 가입국에서 내려진 중재판정은 다른 가입국에서 원칙적으로 집행될 수 있다. 피신청인이 판정국에 자산이 없더라도, 자산이 있는 나라에서 강제집행을 신청할 수 있다.

집행 거부 사유는 제한적이다. 뉴욕협약 제5조가 열거하는 사유 중 하나는 ‘피신청인이 중재인 선정이나 절차에 대해 적절한 통보를 받지 못한 경우’다. 즉, 집행 법원이 심사하는 것은 피신청인이 절차에 ‘실제로 참여했는지’가 아니라 ‘참여할 기회가 적법하게 주어졌는지’다.

바로 이 때문에 중재판정부와 중재기관은 피신청인이 불참하는 사건일수록 절차적 정당성 확보에 더 공을 들인다. 최초 송달의 성공 여부를 문서로 남기고, 이후 모든 통지 시도와 그 결과를 판정문에 상세히 기재한다. 이 사건에서도 판정문은 서류 발송 날짜, 수령 확인 여부, 반송 경위를 빠짐없이 기록했다. 피신청인이 스스로 주소를 바꿔 연락을 끊었다는 사실이 기록에 남아 있는 한, 집행 단계에서 ‘통보를 받지 못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국제중재도 진화한다: 전자 송달의 시대



위 사건 진행 당시 적용된 국제중재규칙에 따르면 피신청인이 절차 참여 의사를 드러내거나 이메일 주소를 별도로 제공하지 않은 이상, 피신청인 측에 대한 통지는 물리적 우편 방식이 원칙이었다. 중재기관은 신청인으로부터 공유 받은 실물 주소지로만 서류를 보낼 수 있었다.

하드카피 우편 송달의 한계는 국제중재에서 오랫동안 반복돼 온 이슈다. 피신청인이 주소를 바꾸거나 잠적하면 절차에 공백이 생기는 이 구조를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 이는 국제중재 실무계와 각 중재기관이 꾸준히 고민해온 과제다.

그 해답이 규칙 개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여러 국제중재기관들은 전자적 통지를 공식 송달 수단으로 명시하는 방향으로 규칙을 개편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대한상사중재원(KCAB)은 2026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새 국제중재규칙 제4조에서 전자주소(이메일)를 유효한 송달 주소로 명시적으로 인정했다. 당사자가 중재 절차에서 이메일 주소를 제공하거나 동의한 경우 해당 주소로의 전자 전달이 적법한 통지로 간주되며, 그러한 동의가 없더라도 최종적으로 알려진 연락처로 전송이 가능하다.

이 변화의 실질적 의미는 크다. 물리적 주소지를 바꾼다고 절차를 늦출 수 있는 시대는 저물고 있다. 중재 신청서에 이메일 주소가 하나라도 기재돼 있다면, 주소를 이전해도 서류는 계속 도달한다. 절차는 더 빠르게 진행되고, 불참하는 피신청인에게 더 신속하게 불리한 판정이 내려질 수 있다. ICC, SIAC 등 주요 국제기관들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 흐름은 가속화될 것이다.

중재 절차는 멈추지 않는다



이 흐름을 국제중재 당사자들은 잘 이해해야 한다. 피신청인에게 더 이상 무시와 회피는 그럴싸한 전략이 아니다. 결국 중재 절차의 바퀴는 계속 돌아가고 판정은 내려진다. 나중에 집행 단계에서 판정의 취소나 불인정을 다투는 것은 훨씬 어렵고 비용도 더 든다. 처음부터 참여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반박하는 것이 유리하다. 설령 청구 일부를 인정해야 할 상황이라도, 절차에 참여해 손해 규모를 줄이는 것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다.

역으로 신청인의 입장에 있는 기업은 상대방이 응하지 않는다고 지레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규칙에 따른 절차를 준수하고 신청취지를 입증하면 된다. 상대방의 불참이 곧 신청인의 완전한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지만, 송달을 꼼꼼히 문서화하고 절차적 정당성을 쌓아가면 판정의 집행 가능성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이 사건의 피신청인은 법인 주소도, 대표 개인의 주소도 버리고 사라졌다. 그러나 판정은 나왔다. 청구 금액 전부가 인용됐고, 법률비용까지 전부 부담하게 됐다.

절차의 적법성이 갖춰지면, 판정은 피신청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내려지고 국경을 넘어 집행될 수 있다. 전자 송달이 표준이 되어가는 지금, 주소를 바꾸고 사라지는 것조차 예전만큼 유효한 전략이 아니다.

국제 거래를 하는 기업이라면 이것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중재를 무시하는 것은 분쟁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불리한 판정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