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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벌 모델' 택한 베트남…민간 대기업에 성장엔진 맡긴다
12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베트남 최대 민간기업 빈그룹은 하노이와 관광지 하롱베이를 잇는 56억달러 규모 고속철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총연장 120㎞인 이 노선이 완공되면 현재 2시간30분인 이동 시간이 30분으로 줄어든다. 국영기업이 주로 맡아온 대형 인프라 사업을 민간기업에 넘겼다는 점에서 베트남 경제정책의 큰 변화로 평가된다.
이 같은 변화는 베트남의 최고 실력자인 또 럼 공산당 서기장이 추진하는 대대적인 관료·경제 개혁과 맞물려 있다. 미국의 관세 정책으로 글로벌 무역 체제가 흔들리는 가운데 베트남 정부는 수출과 FDI에 과도하게 기대는 경제 구조를 바꾸기 위해 한국의 재벌 성장 모델을 참고하고 있다. 대형 민간기업에 주요 프로젝트를 우선 배정하고 토지와 금융에 대한 접근을 지원해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국가대표 기업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응우옌 바 훙은 민간 부문 강화 정책에 대해 베트남 국내 기업의 역량이 경제의 목표와 수요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정부가 명확히 인식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지난해 발표된 민간경제 육성 정책인 ‘결의안 68호’는 2030년까지 글로벌 가치사슬에 참여할 수 있는 대기업을 최소 20곳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민간 부문을 국영기업과 외국기업에 뒤이은 위치에서 ‘국가 경제의 가장 중요한 동력’으로 끌어올리고, 민간기업 수도 2030년까지 200만개로 두 배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훙은 결의안이 민간기업의 장기 자산 투자를 촉진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며 인프라 투자를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다. 그는 이 정책이 한국의 재벌 모델에서 일부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가족 소유의 다각화된 대기업에 인센티브와 저리 금융, 세제 혜택을 제공하고 엄격한 수출 목표를 부여해 빠른 산업화를 이뤘다. 다만 이 과정에서 독점과 중소기업 위축이라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베트남은 그동안 외국인 투자를 기반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미국의 대중국 관세를 피하려는 제조업체들이 생산시설을 중국에서 옮기는 과정에서 최대 수혜국 가운데 하나가 됐으며, 미국은 현재 베트남 전체 수출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동시에 베트남은 국영기업을 성장의 주요 축으로 활용해왔지만 일부 기업이 막대한 부채와 부패 의혹에 휩싸이면서 기존 모델의 한계도 드러났다.
HSC증권의 타일러 응우옌 수석 시장전략가는 결의안 68호가 베트남 민간기업이 외국기업 및 국영기업과 더 효과적으로 경쟁할 수 있도록 공정한 경쟁 환경을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 전략이 여러 아시아의 고도성장 국가들이 밟았던 발전 경로와 유사하다고 분석했다.
실제 대형 민간기업의 사업 영역은 빠르게 넓어지고 있다. 억만장자 팜 녓 브엉이 지배하는 빈그룹은 결의안 68호 이후 최소 2개 고속철도 사업을 수주했으며 하노이 지하철 개발에도 참여하고 있다. 자동차를 생산하는 쯔엉하이그룹(타코)은 베트남을 남북으로 잇는 670억달러 규모 고속철도 사업 입찰에 응했다. 철강업체 호아팟그룹과 통신기업 FPT도 베트남의 잠재적인 ‘재벌’ 후보로 거론된다. 이들 기업은 FT의 논평 요청에는 답하지 않았다.
현재 베트남 대기업들은 1980년대 경제 자유화 이후 성장했으며 정부와의 긴밀한 관계도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베트남 정부는 이번 개혁을 통해 이들의 경제적 영향력을 한층 확대하려 하고 있다. 지난해 8% 성장한 베트남 경제는 향후 5년간 최소 10%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규제 개혁도 속도를 내고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베트남은 2025년부터 올해 4월까지 관료주의를 간소화하고 규제 장벽을 없애기 위해 86개 이상의 법률과 300개의 시행령을 제정했다. 피치솔루션스 산하 BMI의 지안 신 헝 국가위험 담당 선임 애널리스트는 이런 개혁이 베트남 경제의 장기적인 구조적 약점을 바로잡으려는 진지한 시도라고 평가했다. 생산성 증가율 둔화와 경제활동에서 공공 부문이 지나치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점이 대표적인 문제로 지목됐다.
다만 한국식 재벌 모델의 부작용까지 되풀이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ADB의 훙은 소수의 대표 기업이 선도자 역할을 하는 것은 타당하지만 이들이 국내 시장에서 자연독점을 형성하면 성장의 혜택이 중소기업으로 확산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BMI의 헝도 정부 보조금과 지원이 잘못된 산업에 집중될 경우 공공자원이 낭비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기업 부채와 금융시장 여건도 부담이다. 세계은행은 지난 5월 베트남의 기업 레버리지 비율이 동아시아 주요 경제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며 은행권도 유동성 제약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은행은 베트남의 정책 방향 자체는 대체로 옳다면서도 실제 집행 속도가 정책 목표를 따라갈 수 있을지가 더 어려운 문제라고 평가했다.
개혁이 제대로 시행되면 투자 기회가 경제 전반으로 확산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베트남 전문 사모펀드 메콩캐피털의 채드 오벨 파트너는 민간 부문 개혁으로 인프라와 통신, 부동산 분야의 투자 기회가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투자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졌다며 앞으로 대형 프로젝트를 베트남 대기업에 배정하는 것이 기본적인 정책 방향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내다봤다.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