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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보니 차인표라는 감옥"…'죽은 시인의 사회'로 고쳐 쓴 대표작 [씬터뷰]
'죽은 시인의 사회' 차인표 인터뷰
스포트라이트 혼자 받는 미안함
"좋은 어른으로서 젊은 연극인들의 다리 되고파"
"대중 연예인들 지금이라도 연극 도전하길"
스포트라이트 혼자 받는 미안함
"좋은 어른으로서 젊은 연극인들의 다리 되고파"
"대중 연예인들 지금이라도 연극 도전하길"
데뷔 34년 차 배우 차인표가 카메라 앞을 떠나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안정된 시청률을 뒤로하고, 서울 대학로의 고된 연습실에서 젊은 배우들과 땀을 흘린 끝에 마침내 연극 무대에 섰다.
연극 '죽은 시인의 사회'는 1989년 개봉해 제6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을 수상하고, 43회 영국 아카데미 작품상을 휩쓴 톰 슐만(Tom Schulman)의 동명 영화 극본을 원작으로 한 국내 첫 정식 라이선스 프로덕션이다. 2024년 프랑스 파리 무대화 당시 2년 연속 전석 매진과 누적 관객 35만 명을 돌파하며 제35회 몰리에르상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등 이미 세계적으로 입증된 고전 명작이다.
작품은 명문 기숙학교 '웰튼 아카데미'를 배경으로 규율과 입시만을 강요받던 학생들이 새로 부임한 영어 교사 존 키팅을 통해 "카르페 디엠(Carpe Diem·현재를 즐겨라)"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만의 시를 써 내려가는 과정을 다룬다.
이 작품에서 차인표가 연기하는 '존 찰스 키팅'은 학생들에게 수치와 공식으로 시를 평가하는 규율화된 공식을 거부하게 하고, 정해진 정답 대신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는 파격적이고 따뜻한 스승이다. 냉소적인 현실 속에서도 소년들이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아를 확립하고 자신만의 '시'를 써 내려갈 수 있도록 이끄는 진정한 '캡틴'의 면모를 진중하고 강인한 리더십으로 완성해 내고 있다.
11일 서울 종로구 NOL 씨어터 대학로 우리카드홀에서 연극 '죽은 시인의 사회'에 출연 중인 배우 차인표를 만났다. 군대 제대할 때를 제외하고 30년 만에 이렇게 많은 질문을 받아본다며 환하게 웃은 그는, 인터뷰 내내 '늙은 키팅'으로서 전하는 인생의 통찰과 대학로의 젊은 연극인들을 향한 애정, 그리고 연기를 대하는 겸허한 자세를 가감 없이 털어놨다.
차인표는 과거 연극 활동 제안을 지속적으로 받아왔음에도 오랫동안 무대에 서지 못한 속내를 직설적으로 고백했다.
그는 "연극 대본을 많이 받았지만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연습 기간이 길고, 그에 비해 대우는 적고, 대중 연예인으로 출발해 살다 보니 연극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은 있었지만 틀에 박힌 대중 연예인의 삶을 살면서 항상 뒤로 미뤘다"고 회상했다.
그랬던 그가 뒤늦게 연극 도전에 나선 계기는 소설가로서의 삶과 나이에 따른 깨달음 덕분이다. 차인표는 "대중 연예인 활동을 줄이고 나이가 들면서 소설을 쓰는 등 다른 영역에서 활동해 보니, 삶이라는 게 곧 한 가지에 안주할 필요가 없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새로운 도전이 덜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도전이 더 불안하고 부끄러울 수 있지만, 새로운 것을 했을 때 얻는 기쁨이 크다는 것을 느꼈다. 연극 도전 역시 새 영역으로 가는 것이기에 용기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주변의 응원과 함께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21세 때 접했던 원작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였다. 차인표는 "21세 때 봤던 영화를 보며 삶에 대한 자극과 질문을 받았던 기억이 났다. 이제 거의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는데, 이제 와서 보니 20대 초반 키팅 선생의 질문이 인생을 살아가는 질문이었고 그 사람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을 살고 나서 진정성 있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요즘 젊은이들에게 생각을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오만석, 연정훈 등이 작년 말 캐스팅된 것과 달리 차인표는 올 4월 뒤늦게 캐스팅 제안을 받았다. 5월 중순부터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오후 1시부터 밤 10시까지 이어진 고된 연습 일정을 마주한 그는 처음엔 망설였다고 전했다.
"약속도 많고 연습을 안 하면 뒤떨어질 텐데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와서 봤더니 젊은 친구들이 훨씬 일찍 와서 연습하고 있더라. 저는 매니저와 오거나 택시를 타는데, 젊은 친구들은 서울 외곽에 살면서 1시간 반, 2시간씩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와서 몸을 풀고 연습하고 있었다. 열정을 불태우는 이들에게 물을 끼얹으면 안 되겠다, 한 팀이 돼야겠다고 다짐했다. 연습에 빠지지 않고 서로를 보며 자극을 얻었다. 나를 연극배우로 데뷔시켜 준 것은 연습을 함께하고, 지난한 시간을 같이 보낸 젊은 배우들 덕분이다."
원작 영화에서 고(故)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존 키팅'이 30대 초반의 열정적인 스승이었다면, 차인표가 그려낸 키팅은 삶의 수많은 굽이를 돌아온 '늙은 키팅'이다.
차인표는 "영화 속 키팅은 30대 초반 정도로 설정돼 대학 졸업 후 다른 데서 가르치다 부임한 선생님이다. 자신이 믿는 삶을 사는 상태라 맞는지 틀린지에 대한 확실함은 없었을 것"이라며 "반면 나는 '늙은 키팅'이다. 살아보니까 기존의 틀을 부수라는 건 아니지만, 잘못됐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틀도 있단다 얘들아, 여러 선택지가 있으니 다른 선택지도 바라보길 바란다'는 말을 진심을 담아 연기할 수 있다. 그것이 나만의 차별점"이라고 밝혔다.
현대 사회에서 교권이 추락하고 참교육을 다룬 매체가 쏟아지는 현실 속에서, 연극의 낭만적인 메시지가 청소년에게 닿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깊었다.
그는 "현실과 동떨어진 과거의 이야기를 감성팔이하듯 하는 것 아닐까, 우리가 말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는 게 아닐까 연출자와 함께 고민했다. 연극을 보면 지금의 틀은 다 부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 본연의 기본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다. 키팅의 말이 다 맞는 것은 아니며 다른 선택지도 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보육원 지원 및 자립준비 청년을 돕는 단체 '야나'를 통해 200여 명의 청소년을 초청한 경험을 공개했다.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하고 혼자 살아가는 청소년들을 모셨다. 태어나 처음 연극을 본 친구도 있었는데, 눈이 촉촉해져서 오며 감동받았다고 하더라. 연극 한 편이 교육 제도의 구체적인 개선 방향이나 담론을 만드는 건 아니더라도, 연극의 무언가가 이들의 마음을 만져줬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특히 학창 시절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20대 청춘을 향한 진심 어린 메시지도 전했다. "고3 때 제 짝이 학력고사를 한두 달 남겨두고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했다. 나에게 몇 점 맞으면 서울 안의 대학에 가냐고 계속 물어보던 친구였는데 버티지 못했다. 모두가 아파한 기억이 이번 연극의 '닐 페리'와 오버랩됐다. 58세가 돼 40년을 더 살아보니, 학력고사를 망쳐도 좋은 학교에 못 가도 살아낼 수 있고 그 안에서 즐거움과 행복이 있더라. 그 친구들에게 '살아봤더니 그렇더라, 다른 선택지가 있단다'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카르페 디엠'은 지적이 아니라 오늘을 선택할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선언이다."
대사 중 '누구나 자신만의 시를 갖고 태어난다', '삶의 본질을 만끽하라'는 문장에 대해 차인표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철학적인 회고를 남겼다.
차인표는 "어떤 시각에서 보면 태어나 보니 차인표라는 감옥에 갇혀 산 거였다. 감옥이란 표현이 과하다면 틀이나 테두리다. 어머니, 아버지, 사는 동네가 정해져 있고 가정환경이 주어진 틀 안에서 나이가 들고 보니 모든 선택을 그 안에서 하게 됐다. 직업적으로나 삶의 굽이마다 굳이 안 해도 되는 선택은 피해 가며 안전하다고 느끼며 산 것 같다"고 고백했다.
이어 "하지만 돌아보면 그렇게 안주하며 살았던 삶은 기억에 남지 않는다. 어떤 틀에서 벗어나 불편하더라도 무언가를 했을 때, 배우를 하다가 소설을 썼을 때, 직장을 다니다 배우 시험을 봤을 때, 군대 훈련소에 갔을 때, 갑자기 결혼했을 때처럼 가슴 설레고 나를 만든 이벤트들이 기억에 남는다.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고 소회를 전했다.
또한 30년 넘게 대중 연예인으로서 누린 혜택에 대한 부채감을 털어놓으며, 대학로의 젊은 연극인들을 향한 책임감을 강조했다.
"운이 좋게 가진 것에 비해 아내(신애라)까지 많은 사랑을 받아 한평생 가족을 일구고 잘 살았다. 혜택을 받은 사람으로서 대학로에 와서 보니 수많은 젊은이가 내일 없이 오늘을 불태우며 땀을 흘리고 있더라. 과연 연극하는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기회를 창출해 줄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연습을 같이했는데 나만 팬들에게 꽃다발을 받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 같아 퇴근하는 친구들에게 미안하고 미망했다. 영화 감독과 제작자들을 모셔 표를 사드리며 이 친구들이 매체로 진입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려 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어른이란 일을 같이했을 때 그 열매를 혼자 독차지하지 않고 젊은 친구들과 나누는 사람이다."
첫 연극 무대를 경험한 차인표는 대중 연예인 동료들을 향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연극이 이렇게 매력이 있는 줄 알았으면, 배우가 되려면 연극을 했어야 했구나 아주 일찍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도 했다"며 "드라마나 영화를 찍을 때는 대사를 수백 번 반복하지 못하지만 연극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대에 오를 수 없다. 배우로서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대중 연예인들이 지금이라도 연극을 하면서 자기 성장을 같이 하면 좋겠다"고 단언했다.
이어 연출자 및 후배들과의 호흡에 대해 "무대가 처음인데 연출님이 나나 연정훈, 오만석에게는 연기 지적을 한마디도 안 하시더라. 몇십 년 동안 연기했으면 책임져야 한다는 뜻으로 보였다"며 "내가 먼저 후배들과 선배들에게 찾아가 '내 연기 어땠냐'고 조언을 구했다. 먼저 귀를 열고 물어보니 부족한 성량과 호흡, 분절에 대해 충고해주더라. 연극은 혼자 잘해서 되는 게 아니라 축구처럼 서로 대사를 놓치면 애드리브로 메워주며 앙상블을 만들어가는 팀플레이"라고 덧붙였다.
아내 신애라의 서포트와 가족들의 반응도 이야기했다. "아내가 자기가 연극하는 것처럼 떨린다고 하더니 연극을 보고 나서는 '거봐, 하길 잘했지?' 하더라. 물심양면으로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멋진 도시락을 선물해 줘서 너무 고마웠다. 막내딸도 19살인데 친구 찬희 배우를 보려고 3번이나 예약해서 관람했다"며 웃었다.
인터뷰 마무리에 이르러 차인표는 데뷔작이자 최고 히트작인 '사랑을 그대 품안에'를 언급하며, 이번 연극이 자신에게 남긴 특별한 의미를 털어놨다.
"과거 인터뷰에서 이번 연극을 제 인생의 대표작으로 바꾸고 싶다는 바람을 말했을 때 입방정을 떤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다. 하지만 84세이신 어머니가 생애 처음으로 제 연극을 보시고 문자를 보내주셨다. '인표야, 네가 이번에 대표작을 죽은 시인의 사회로 바꾸게 된 것을 축하한다'고 하셨다. 어머니의 그 평가 하나로 제가 꿈꾼 모든 것을 이뤘다."
한편, 차인표가 '존 찰스 키팅'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 연극 '죽은 시인의 사회'는 오는 9월 13일까지 NOL 씨어터 대학로 우리카드홀에서 공연된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