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 협력센터 개소식 /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조선업 협력센터 개소식 /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지난달 23일 미국 워싱턴DC 메이플라워호텔 로비는 아침부터 북적였다. 한미 조선업협력센터 출범식에 참석하려는 인원이 행사장을 가득 메웠고, 테이블에 미처 다 앉지 못한 이들이 옹기종기 벽에 붙어섰다. 오전 10시 행사인데도 커피 등은 물론이고 간단한 뷔페에 와인바까지 준비된 것이 눈길을 끌었다. ‘성대하게 해야 한다’는 미국 측 당부가 있었다고 했다.

가장 귀빈인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 처음부터 한 시간 가까이 늦겠다고 했던 그의 도착 예정시간이 조금씩 변경된 탓에 예상보다 많은 이들이 단상에 올랐다. 끝없는 덕담이 한 시간 훌쩍 넘게 이어졌다. 하지만 수백명의 인파 가운데 이 자리를 마음 편하게 즐긴 이가 있었을 지는 의문이다.

표면적으로 미국 조선업의 재건을 가장 바라는 것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이다. 작년 7월 트럼프 정부와의 관세협상 과정에서 발표된 한국의 ‘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는 한미 양국의 이해를 잘 조화시킨 구상처럼 보였다. 한국 조선업 생태계에도 이런 정책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당장 관련 주가가 뛰어올랐다.

1년이 지나 조선업 협력센터 출범에 이르렀지만, 이 센터를 통해 양국이 무엇을 할 것인지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정부는 정치적인 과실을 챙기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 러트닉 장관은 단상에 올라 센터의 성과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행사나 회의가 아니라 “미국산 선박 건조 실적으로 판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듣고 있는 한국 정부나 조선업계 관계자들의 표정이 좋을 리 없다. 현재 말만 하고 행동을 하지 않는 쪽은 미국이다. 러트닉 장관은 규제 문제가 있으면 다 풀어주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아무 것도 풀린 것이 없다.

트럼프 정부의 해양 행동계획(MAP)은 한국 등 동맹국에서 초기 물량을 건조하겠다는 가교 전략이나 비자 예외를 약속하고 있으나 의회에서 관련법은 수정되지 않고 있다. 일부 진전이 되었다가도 조선소가 있는 지역의 의원들이 반대하면 도루묵이 되기 일쑤다.

한 로펌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공화당 지도부에 요청하면 문제를 풀 수 있다”고 했다. 정말 급하면 그렇게 했을 텐데, 그런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중간선거에서 자칫하면 ‘외국에 조선업을 내줬다’며 표를 잃을까 우려해서다. 미국 정부 측 인사들도 이런 사정을 모르지 않는다. 백악관의 의지는 현실에 막혀 있다.

미국 조선업계도 다수 참석했다. 그들의 마음은 더욱 심란하다. 이들은 조선업 협력이 진짜로 성사되면 빠른 속도로 자신들이 경쟁력을 잃을 수 있음을 직감하고 있다. "그냥 한 번 보러 왔다"며 말을 아끼던 이들은 이 행사에서 가능성이 아니라 리스크를 확인하고 있었다. 한국과 같은 나라에 일부라도 사업을 내줬다가는 미끄러운 경사(slippery slope)에 놓인 것처럼 일감이 급속도로 넘어가리라는 우려가 크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국가 간 거래의 대상이 된 한국 조선업계는 곤란한 처지다. 눈에 띄는 성과만 우선 바라는 트럼프 정부의 조급함과 달리 사업을 도모할 핵심 조건이 전혀 갖춰지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선박의 수요에 관한 신호 부재다.

트럼프 정부는 지속적으로 미국에서 모든 종류의 배를 짓겠다고 주장한다. 특히 군함 외에 상선을 지을 역량을 갖추겠다면서 한국을 채근하고 있다. 누가 한국이나 중국산보다 4~5배 비싸게 생산된 배를 사줄 것이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외면하고 있다.

군함 역시 마찬가지다. 빨리, 많이 짓겠다면서도 모든 것을 미국 내 생산을 고집하는 것은 모순적이다. 배 지을 사람도 없다. 노동력 부족은 현재 미국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다. 트럼프 정부의 이민 정책은 이 문제를 급속도로 악화시키고 있다. 정책을 되돌릴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한국에 대한 비자 문제가 말처럼 쉽게 안 풀리는 것도 결국 그것이 미국 노동력을 대체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미국의 한 조선 분야 전문가는 트럼프 정부의 조선업 재건 계획을 두고 “환상적인 사고(magical thinking)에 기댄, 조선업 쇼(shipbuilding theater) 아니냐”고 신랄하게 표현했다. 그는 한국 내에서 긍정적인 이야기만 너무 많이 되고 있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 양국 정부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힌 상황에서 실제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고, 일반 대중이 부풀려진 정치적 수사에 과도한 기대감을 갖는 것 같다고도 지적했다.

한국에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안보 측면에서 미국이 조선 분야의 역량을 회복하려는 방향은 맞다. 한국은 장기적으로 이 파트너십의 수혜를 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트럼프 정부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작더라도 차근히 현실적인 성과를 만들어나가는 데 집중해야 할 때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