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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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출범 이후 선진국은 다른 나라의 산업 보조금 지급에 제동을 걸어왔다. 미국은 2000년대 초부터 중국의 철강 및 알루미늄 산업 보조금을 문제 삼아 고율 관세를 부과했다. 2014년에는 유럽연합(EU)이 중국산 태양광 패널에 비슷한 조치를 취했다. 미국과 EU는 여객기 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문제를 놓고 15년에 걸쳐 국제 소송을 치렀다.

2020년을 전후해 보조금 지급은 더 이상 선진국에서 금기가 되지 않고 있다. 미국과 EU는 관련 법안을 제정해 노골적으로 자국 산업에 보조금을 퍼주고 있다. 산업 정책부터 글로벌 투자 흐름까지 완전히 뒤바뀌고 있다는 지적이다.

◇ 선진국으로 역류하는 공장

세계화의 공식은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의 자본 및 기술을 한국, 중국, 대만 등의 공장 및 노동력과 결합하는 것이었다. 2020년대 들어 이 같은 흐름이 극적으로 바뀌고 있다. 중국은 세계 3위 해외직접투자(FDI)국이 됐고, 한국과 대만은 미국에 첨단 반도체 클러스터를 짓는다.

20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의 ‘세계 투자 보고서 2026’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FDI에서 중국 일본 한국 대만 등이 차지하는 비중은 3분의 1이었다. 일본(1860억달러)과 중국(1740억달러)이 주도하는 가운데 대만(450억달러), 한국(410억달러)이 그 뒤를 이었다.
亞기업이 美·유럽에 공장 설립…세계화 '기본 공식'이 바뀐다
최근 각광받는 반도체 분야에선 동아시아 국가의 집중도가 크게 올라간다. 2020~2025년 발표된 세계 반도체 그린필드(현지 설립 투자) 투자액 중 대만 기업 비중은 45%, 한국은 10%였다. 해당 투자 유치국은 미국이 1위로 전체의 47%를 차지했다. 선진국이 자본을 공급하고 후발국이 공장을 짓던 전통적 구도가 첨단 제조업에서 뒤집혔다.

◇ 국가 주도의 세계화

산업 정책으로서 정부 보조금 지급은 갈수록 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 공개한 ‘산업 보조금 데이터베이스’ 보고서에 따르면 항공 방위, 자동차, 반도체, 철강, 조선 등 15개 핵심 제조업종의 세계 주요 기업 525곳이 2024년 받은 산업 보조금은 1080억달러(약 160조원)로 집계됐다. 기업 매출 대비 1.3%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약 1.8%) 후 가장 큰 규모다.

중국이 여전히 관련 정책을 주도하고 있다. 세계 보조금의 52%인 약 562억달러가 중국 기업에 돌아갔다. 중국 기업은 2005~2024년 매출 대비 OECD 회원국 기업보다 평균 3~8배 많은 지원을 받았다.

여기에 미국은 극적인 변신으로 대응하고 있다. 주요 기업 지분을 정부가 확보해 사실상 준공기업으로 만들고 판로까지 보장해주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외교협회(CFR) 집계에 따르면 미국 연방정부가 지난해 1월 이후 발표한 미국 기업 대상 지분·준지분 투자는 30건으로 총 267억달러(약 40조원)에 달한다. 지난해 8월 반도체법 보조금을 지분으로 전환해 인텔 지분 약 10%를 확보한 미국 상무부가 3대 주주에 오른 것이 단적인 예다.

◇ 수출국의 통화 약세도 촉발

‘롤체인지’(역할 변화)는 외환시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수출해도 외화가 유입되지 않아 환율이 높아지고, 그에 따른 물가 상승으로 수출국이 고통받는 것이다.

한국은 올 상반기 1380억달러 무역흑자를 냈지만 원·달러 환율은 한때 1535원까지 올랐다. 수출로 번 달러가 미국 투자 등으로 빠져나가 ‘경상흑자=원화 강세’ 고리가 끊긴 것이다. 원화 약세는 수출 주문보다 에너지 및 원자재 가격과 생활물가를 빠르게 올려 정부의 경제 운용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일본은 더 심각하다. 일본은행이 지난달 기준금리를 1990년대 이후 최고인 연 1.0%로 올렸지만 엔화는 이달 초 달러당 162.07엔까지 밀리며 1986년 후 40년 만의 최고치(엔화 가치 하락)를 기록했다. 일본에서도 수입 물가 상승이 실질 임금을 갉아먹는 ‘나쁜 엔저’ 논쟁이 커지고 있다.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