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책장과 구두, 그리고 더치페이
경영컨설턴트로 일하던 시절, 우수 은행원의 노하우를 정리해 조직 전체로 확산시키는 프로젝트를 수행한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뛰어난 기업대출 담당자는 재무제표만 들여다보지 않았다. 경영진 집무실의 책장에 어떤 책이 꽂혀 있는지 살피고, 대출 신청자의 구두가 얼마나 잘 관리돼 있는지까지 유심히 봤다. 숫자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의 태도와 습관, 그리고 신뢰를 읽어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금융은 크게 달라졌다. 인공지능(AI)은 금융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고객 상담부터 개인에게 꼭 맞는 금융 제안까지 AI가 도맡아 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앞으로 기술은 금융을 더욱 빠르고, 더욱 똑똑하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할수록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 있다. 금융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금융은 오랫동안 숫자로 사람을 바라봐 왔다. 신용점수와 소득, 거래 이력은 금융을 움직이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AI는 더 많은 데이터를 분석하겠지만, 숫자만으로 사람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같은 신용점수를 받은 사람이라도 살아온 삶이 다르고, 금융이 필요한 이유도 모두 다르다. 과거의 기록만으로는 사람의 가능성과 신뢰까지 모두 담아낼 수 없다.

AI 시대, 데이터는 더 이상 정보의 집합이 아니다. 데이터는 금융이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 할 새로운 언어다. 중요한 것은 데이터를 얼마나 많이 모으느냐가 아니라, 데이터를 통해 사람을 얼마나 깊이 읽어낼 수 있느냐다.

그래서 좋은 금융은 숫자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먼저 보는 데서 출발한다. 고객의 삶과 일상을 더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금융은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고, 고객에게 더 나은 선택을 제안할 수 있다. 기술은 사람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더욱 깊이 살피도록 돕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이 같은 철학은 신용을 바라보는 방식부터 자산관리까지 다양한 서비스에 담겨야 한다. 대안신용평가는 기존 금융 이력만으로 평가받기 어려운 고객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시도다. 과거의 숫자 기록만이 아니라 사람의 가능성과 신뢰까지 함께 살펴보려는 노력이다. 사회초년생처럼 금융 거래 이력이 부족한 고객도 일상 속 다양한 금융 활동을 통해 더욱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카카오톡으로 전달된 친구의 더치페이 요청에 바로 응답하고, 매달 작은 금액의 정기구독료를 성실히 납부하는 습관에도 사람의 신뢰는 담겨 있다.

AI는 이러한 시도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킬 것이다. 행동 데이터와 비정형 정보까지 함께 읽어내며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상황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람을 더 깊이 살필수록 금융은 고객의 일상 속에서 더욱 자연스럽고 든든한 동반자가 된다.

금융이 읽어야 할 것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다. 책장과 구두를 살피던 시대에도, 더치페이와 정기구독료를 들여다보는 시대에도 금융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고객의 일상을 살피고 삶에 가장 필요한 순간 더 나은 선택을 함께하는 것. 이를 기술로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금융의 미래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