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은 시작을 알리지 않았다. 객석이 채워지는 동안부터 공간에는 바이올린인지 전자음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낮은 음 하나가 오래도록 진동했다. 객석이 완전히 암전되지도 않은 채,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는 무대 한가운데에 등장했다.
6월 30일 서울 GS아트센터에서 열린 '양인모×김치앤칩스'는 클래식 연주회도, 미디어아트 전시도 아니었다. 2022년 시벨리우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우승으로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린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와 영국인 엘리엇 우즈·한국인 손미미로 구성된 미디어아트 듀오 김치앤칩스가 처음 선보인 협업 프로젝트였다. 빛과 공간을 탐구해온 김치앤칩스와 바이올린 연주자 양인모는 음악과 빛을 하나의 감각으로 경험하도록 무대를 꾸몄다.
양인모X김치앤칩스 공연의 한 장면. ⓒGS아트센터·photograsshopher
공연의 서두를 열어젖힌건 미국 미니멀리즘 음악의 거장 스티브 라이히의 '바이올린 페이즈'(1967)였다. 짧은 음형 하나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전자음향과 바이올린은 미세한 시간차를 두고 서로를 쫓으며 새로운 패턴을 만들었다. 김치앤칩스의 빛 역시 같은 방식으로 공간을 채웠다. 소리는 잔향처럼 번지고 빛은 음표를 따라가듯 중첩된다. 멜로디라고 할 만한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견디기 쉽지 않았다. 파가니니에 비견하는 '인모니니'라는 별명을 가진 양인모의 선율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다소 당혹스러웠을 법하다. 공연은 '언제쯤 음악다운 음악이 시작될까'라는 조바심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듯 보였다. 빠른 전개와 강한 자극에 익숙한 감각을 의도적으로 늦추려는 시도가 지속됐다.
20여 분이 흐른 뒤 비로소 등장한 것은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D단조'였다. 앞선 반복으로 비워낸 귀 위에 바흐의 선율은 더욱 또렷하게 새겨졌다. 스티브 라이히가 시간의 감각을 확장했다면 바흐는 비로소 음악의 서사와 감정을 불러왔다. 앞선 20분은 지루한 도입이 아니라 바흐를 위한 긴 호흡처럼 다가왔다.
양인모X김치앤칩스 공연의 한 장면. ⓒGS아트센터·photograsshopher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한 건 미국 현대음악 작곡가 줄리아 울프의 'LAD'(2022)였다. 벽면을 가득 메운 빛의 파장과 양인모의 강렬한 보잉이 맞물리며 음악과 빛은 앞선 무대보다 긴밀하게 호흡했다. 다만 두 매체가 완전히 하나의 언어로 융합됐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끝까지 서로의 경계를 유지한 채 공존을 모색하다 끝난 것처럼 느껴졌다. 더욱이 김치앤칩스의 시각효과는 예상만큼 화려하거나 기술을 과시하지 않았다. '최첨단 미디어아트'라는 수식만 떠올렸다면 심심한 구성이었다.
어쩌면 이번 무대를 이해하는 열쇳말은 '개념미술'일지 모른다. 개념미술은 결과물보다 아이디어와 사고 과정을 작품의 핵심으로 삼는다. 작품은 감탄의 대상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매개다. '양인모×김치앤칩스'는 독주자를 내세웠지만 그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주지 않았다. 공연 내내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반복은 왜 음악이 되는가', '빛은 어디까지 음악을 시각화 할 수 있나', '우리는 무엇을 듣고 보고 있다고 믿는가'.
양인모X김치앤칩스 공연 후 커튼콜. ⓒGS아트센터·photograsshopher
공연이 끝난 뒤 객석에선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 터져나왔다. 역설적으로 작품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 지점이었다. 이런 반응과 더불어 양인모와 김치앤칩스가 함께 한 80여 분의 실험이 모두 성공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음형과 조명의 반복이 길어지면서 긴장감이 느슨해지는 구간이 있었고 음악과 빛 사이에도 끝내 일정한 거리감이 감돌았다. 작품이 의도한, 기이한 기다림이 일부 관객에게는 사유보다 피로로 다가왔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익숙한 클래식 공연의 문법을 벗어나 공연의 시간을 새롭게 경험하게 했다는 점만큼은 의미 있었다. 검은 의상을 입고 등장한 양인모는 순간적으로 스타워즈의 제다이를 연상시켰고, 그의 손에 들린 것이 활인지 광선검인지 잠시 헷갈릴 정도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흐려졌다. 완전한 융합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클래식과 미디어아트의 접점을 탐색한 이번 무대는 장르를 넘어선 새로운 감각의 가능성을 보여준 실험으로 기억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