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정부가 투자와 연계한 이른바 '황금 여권(Golden Passport)' 제도를 도입해 국가부채 상환 재원 확보에 나선다. 수십억달러 규모의 부채 상환 부담을 앞둔 가운데 해외 자본을 직접 유치해 외화 조달 기반을 확대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30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정부는 올해 안에 일정 금액을 투자하는 외국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제도를 시행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사안에 정통한 관계자 2명은 약 50만달러를 반환되지 않는 기부금 형태로 납부하거나 약 100만달러 규모의 무이표 국채를 매입하는 조건이 검토되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세부 내용은 정부 내부 최종 조율 과정에서 변경될 가능성이 있다.

정부는 이 제도를 통해 앞으로 예정된 수백억달러 규모의 국가부채 상환 부담을 일부 완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2020년 국가채무 재조정 이후 아직 국제 자본시장에 정상적으로 복귀하지 못한 상태로, 외화 확보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왔다.

제도가 시행되면 아르헨티나는 투자 시민권을 운영하는 국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국가 중 하나가 된다. 또 아르헨티나 시민권은 현재 운영 중인 다른 투자 시민권 프로그램보다 더 많은 국가에 무비자 입국이 가능해 투자자들에게 높은 이동성을 제공할 것으로 전망된다.

투자 시민권 제도는 최근 세계 각국에서 정부의 재원 확보 수단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에서 운영되던 황금 여권 제도는 지난해 유럽연합(EU) 최고법원 결정으로 사실상 금지됐으며, 국제 투명성 단체들은 부패를 조장하거나 국가 안보 위험을 키울 수 있다는 이유로 지속해서 비판해왔다.

이번 정책은 하비에르 밀레이 정부가 국가 이미지를 새롭게 구축하려는 전략과도 맞물린다. 아르헨티나는 높은 부유세와 반복된 경제 불안으로 인해 자산가들의 해외 이전이 이어져 왔다. 전자상거래 기업가인 마르코스 갈페린은 2020년 우루과이로 거주지를 옮긴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 데이터 분석기업 팔란티어 공동창업자인 피터 틸도 지난 4월 가족과 함께 일시적으로 아르헨티나에 거주지를 옮겼다. 그의 주변 인사들은 밀레이 정부의 긴축재정과 규제 완화 정책을 직접 관찰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정부 자문을 맡은 투자이민 컨설팅업체 아톤캐피털의 창업자 아르망 아르통은 피터 틸이 "프로그램이 공식 출범하기 전 최고의 홍보대사"라고 평가했다. 그는 새 제도에는 거주 의무가 포함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참가자의 세금 부담도 제한될 수 있다고 밝혔다.

투자이민 업계에서는 정치적 양극화와 세금 정책 변화, 러시아와의 전쟁 가능성 등을 우려하는 미국과 유럽의 자산가들에게 아르헨티나가 새로운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인구 약 4천600만명의 주요 20개국(G20) 회원국인 아르헨티나는 약 170개국에 대한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며,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와인 산업, 관광 자원 등도 투자 매력으로 꼽힌다.

다만 투자 시민권 제도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적지 않다. 여러 국가가 시민권 판매 프로그램을 시행했다가 사회적 논란 끝에 폐지하거나 축소한 전례도 있다.

아르헨티나 시민권국 고위 관리 출신인 이민 전문 변호사 파울라 카렐로는 투자 시민권 제도가 안보와 국가 이미지 측면에서 다양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안보와 국가 신뢰도에 미치는 여러 위험이 아르헨티나 같은 규모와 위상을 가진 국가가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더 크다"고 평가했다.

향후 시장에서는 최종 투자 조건과 거주 요건, 세금 적용 방식, 실제 시민권 취득 절차가 어떻게 확정되는지가 제도의 성패를 좌우할 핵심 변수로 주목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