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장편 '아코디언'으로 돌아온 천명관
부커상 최종후보작 <고래>로 세계 문학계의 주목을 받은 천명관이 10년 만에 장편소설 <아코디언>으로 돌아왔다. 새 무대는 인공지능과 플랫폼이 일상을 지배하는 현재가 아니라,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1950년대 서울이다. 우리가 너무 빨리 잊어버린 도시의 그림자 속으로 독자를 밀어 넣는다.

주인공 동이는 피란길에 가족을 잃고 앵벌이 조직에 흘러든 소년이다. 양 목사의 위선과 폭력, 약물 ‘구름탄’의 유혹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아이들의 세계는 잔혹하다. 그러나 천명관은 비참함에 머물지 않는다. 동이가 낡은 아코디언을 만나고, 연이와 거북이, 깜상 같은 친구들과 함께 거리에서 노래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생존기를 넘어 성장과 연대의 서사로 확장된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압도적인 이야기의 힘이다. <고래>가 그랬듯 천명관의 문장은 거침없이 질주한다. 구걸은 공연이 되고, 폐허는 무대가 된다. ‘목포의 눈물’ ‘베사메무초’ 같은 유행가들이 흐르는 가운데 전후 서울의 냄새와 소리, 빛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아코디언>은 약한 존재들이 어떻게 서로의 숨을 붙들고 삶을 이어가는지를 묻는 소설이다. 잔혹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생명력과 희망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접히고 펼쳐질 때마다 숨을 토해내는 악기처럼, 이 소설은 구겨진 삶의 주름 속에서 가장 뜨거운 리듬을 길어 올린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