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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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권보호국'을 만들어야 한다. 동의하는 독자들이 많겠다. "교권보호국이 뭔데?" 이렇게 되묻는 이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교권보호국이 뭐라고 세계가 주목하는가? 올해 6월 여름을 달군 넷플릭스 시리즈 '참교육' 얘기다.

사람들은 왜 이 시리즈에 열광하는가? '더임코치의 컨피던스 코칭'의 눈으로 살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참교육이 참코칭했다'는 것이다. 극중 임한림(진기주 분)의 명언으로 참코칭을 설명해 보면 이렇다. "적응은 무서운 체념을 부른다." '더임코치의 컨피던스 코칭'이 추구하는 가치다.

참고로 이번 얘기는 교권보호국 얘기가 아니라 이 시리즈의 성공 요인이다. 칼럼을 시작하기에 앞서 교육 현장을 배움의 전당으로 지키는 선생님과 학생, 사회 시스템 모두에 존경을 표한다.

내가 나화진이고 임한림이다

무너진 교권을 바로잡기 위해 신설된 교육부 산하 교권보호국에서 파견된 나화진(김무열 분)과 임한림, 두 명의 독보적 캐릭터가 보여주는 행보는 시청자들에게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표면적으로는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단순한 ‘사이다 액션물’이나 ‘권선징악의 대리만족’으로 소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나와 주변 모두 공감하면서 보고 있었다. 나화진의 김무열, 임한림의 진기주 두 배우의 연기와 대사는 내 생각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두 배우가 무너진 교육 현장에서 휘두르는 회초리는 사실, 시청자들이 들고 싶은 회초리다. 이 시리즈가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시청자인 내가 나화진이고, 임한림이다. 극중 배우와 시청자인 나를 '동일시'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대신하는 그들이 나인 셈이다. 몰입도가 높다. 광고 시간마저 채널이 돌아가지 않는다.

컨피던스 코칭의 눈으로 보면 시청자의 마음을 읽은 것이다. 코칭 용어로는, '시청자의 존재를 배우의 존재로 인정한 것'이다. 배우와 시청자가 다르지 않다. 많은 시청자가 시리즈 10화를 정주행하는 배경이다. 배우인 나는 교육 현장에서 교육받을 권리를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하게 했다. 놀라운 코칭이다.

익숙한 곳엔 진짜 해답이 없다

적응은 무서운 체념을 부른다. 다시 배우 진기주의 말을 떠올린다. 다니던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배우가 되면서 한 얘기다. 익숙해지면 나태해진다. 사고는 ‘적응’하고, ‘익숙’해진 곳에서 난다. 그래서 ‘적응과 익숙’은 경계 대상이다. 교육 문제에서 시청자들의 ‘적응과 익숙’의 영역은 어딘가?

‘참교육’은 철저하게 이 프레임을 벗었다. 관점의 1번은 교육을 받을 권리가 무시당하는 배움의 전당, 즉 학교다. 배움과 가르침이 무시당하는 학교를 대변한다. 그러니 학교가 배움의 전당의 역할을 못 하게 하면 다 빌런이다. 학생과 선생, 사회 시스템 모두 해당한다.

선생님의 관점은 더 시청자를 긴장시킨다. 학부모 또는 시청자 관점에서의 선생님은 다르다. 지식의 전달은 기본이다. 정의가 무엇인지, 또 올바른 가치관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선생님을 상상한다. 적어도 선생님이 내 아이, 우리 아이들에게 그렇게 해 주길 바란다. 그래서 선생님 시점에서 교육을, 그 현장을 본다.

이 드라마가 성공한 것은 이 지점을 명확히 판단한 것이다. 나화진의 말을 빌려 본다. 어른이 애들을 무서워하면 세상은 망하는 겁니다. 어른이 아이들을 무서워하는 시각으로 교육 현장을 본 것이다. 이는 코칭의 핵심인 ‘관점의 전환’이다. 코칭은 익숙한 프레임을 깨뜨리는 작업이다. 프레임 안에서 해답을 찾지 못해서 코칭을 받는 것이다.

인간의 속성, 그 이중성을 깨다

나는 사실 극중 빌런인 학생이고, 학부모이기도 하다. 현실로 보면 나화진, 임한림 보다는 빌런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참교육에 열광하는 시청자 모두가 그렇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정도의 차이 스펙트럼, 이렇다. 현실 속 나는 본능이고, 시청자인 나는 이성이다.

이는 인간이 갖는 이중성이다. 인간은 누구나 선과 악의 이중성을 지닌다. 그런데도 세상은 거대한 혼돈으로 침몰하지 않고 유지된다. 그 이유는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선(善)으로 악(惡)을 억누르는 내면의 힘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참교육’ 속 빌런들과 시청자들의 차이는 무언가? 시청자들과 빌런들의 차이는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다. 누구나 다 그런 빌런들이 될 수 있다.

"애 아빠가 화가 많이 났어요." 이 시리즈로 주인공급 대우를 받는 빌런이 한 말이다. 시리즈가 부각되면서 빌런들 모두가 주목받았지만 유독 더 큰 관심, 최악의 빌런으로 등장한 극중 '우진 엄마'다. 우진 엄마도, 우진 아빠도 우리 시대의 평범한 일상들이다. 시청자들도 같다. 선생님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다. 현실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던 사례를 인용했다고 들었다.

코칭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가진 ‘가능성의 무한함’과 맞닿아 있다. 참교육은 시청자들의 이런 내면을 조용하지만, 울림 있게 파고들었다. 그래서 빌런을 잉태하고 있는 자신을 내려놓게 만든다. 시청자들은 나화진과 빌런들을 오간다. 다음 편의 나는 나화진인가 빌런인가가 궁금하다. 정주행 이유다. 참교육이 참코칭하고 있다.

악을 찾아내는 서사는 몰입이다

‘참교육’이 시청자들을 화면 앞으로 거칠게 잡아끄는 힘은 뭘까? 교권보호국도, 화려한 액션도, 권선징악도, 화려한 시나리오도 아니다. 악을 찾아내고 포위해 들어가는 정교한 기술이다.

시청자들은 참교육의 서사가 결국 권선징악으로 귀결될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도 매 순간 손에 땀을 쥐며 눈을 떼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잠시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면 전개를 따라가지 못한다. 스트리밍을 멈출 수 있어 다행이다. 그만큼 빌런과의 전쟁이 정교하다.

가해자들이 완벽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그걸 본 시청자 마음도 움직인다. 이 길로 따라가면 시청자는 빌런이 된다. 이때 나화진과 임한림은 서두르지 않는다. 그들이 스스로 모순에 걸려 넘어지도록 심리적 압박을 가하고, 숨겨진 진실을 스스로 입 밖에 내게 만든다.

이 팽팽한 긴장감은 코칭에서 말하는 ‘의식 확장’과 일치한다. 코칭에서 코치는 단순히 답을 주지 않는다. 코칭을 받는 사람이 알아채지 못했던 본질적인 모순을 찌르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선을 좌절시킨 악이 긴장감을 키운다

이 시리즈가 가진 또 하나의 기막힌 장치는, 서사가 결코 호락호락하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극 전체를 통틀어 언제나 정의가 승리하는 아름다운 순간만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의 기억이나 극 중반부의 에피소드들에선 악이 선을 무참히 장악하고 짓밟았던 잔혹한 상흔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동료 교사이자 연인이었던 인물이 제자의 칼에 찔려 목숨을 잃은 사건, 악의적인 여학생의 모략과 거짓 미투(Me Too)에 성추행범으로 몰려 주차장 차량에서 생을 마감한 남자 선생님 스토리가 나온다. 시청자들을 깊은 슬픔과 격렬한 분노로 몰아넣는다. 시청자의 권선징악에 대한 기대가 극에 달한다. "걱정 마세요,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선생 편도, 학생 편도 아닌 피해자 편입니다." 나화진의 명대사다.

이것은 컨피던스 코칭으로 보면 ‘강점 발견’이다. 시청자가 나화진, 임한림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를 강점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안타까운 사연들을 통해 시청자의 분노를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머릿속으로 강력한 ‘징악(懲惡)’의 대가를 갈망하게 만든다.

한계 없는 '나쁨'은 긴장을 높인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까지 나쁠 수가 있을까? 뉴스나 기존 드라마에서 보던 ‘철없는 아이들’이나 ‘이기적 학부모’의 수준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시청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까지?’라며 몰입한다. 소위 나쁨의 한계를 없앴다. 시청자들은 치를 떤다.

애들이 저걸 보고 배우면 어쩌나? 시청자들은 걱정한다. 바로 이때 나화진과 임한림은 이 ‘무한대의 악’을 ‘무한대의 강함’으로 상대한다. 유약한 온정주의나 어설픈 타협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 행동의 대가를 고스란히 돌려주는 강력한 원칙으로 맞선다. 빌런들이 나쁨의 한계를 넘었다면, 이들은 ‘강함의 한계’를 없앴다.

"자신이 한 행동을 고스란히 돌려받음으로써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깨닫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진짜 교육입니다." 나화진의 말이다. 이는 컨피던스 코칭이 얘기하는 ‘강점이 자신감으로 승화’하는 과정이다. ‘잘될 거야’라는 권선징악을 기다리는 시청자를 업그레이드시킨다.

이처럼 넷플릭스 시리즈 ‘참교육’은 컨피던스 코칭으로 참코칭했다. 스스로 관점을 바꿨다. 위선을 벗어 던졌다. 의식을 확장했다. 존재를 인정했다. 그리고 강점으로 각성했다. 마침내 강점을 극한으로 끌어 올렸다. 스스로 ‘성장과 확신의 서사’ 주인공이 된 것이다. 참교육이 참코칭했다.

<한경닷컴 The Lifeist> 더임코치/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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