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4일(현지시간)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콩쿠르' 피아노 부문 우승을 차지한 피아니스트 손세혁. (c) Pražské jaro_Petra Hajská
5월 14일(현지시간)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콩쿠르' 피아노 부문 우승을 차지한 피아니스트 손세혁. (c) Pražské jaro_Petra Hajská
"꿈같아요. 우승 직후 사이먼 래틀 경을 만났는데, 너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제 플레이리스트의 절반이 그분이 지휘한 앨범들이거든요."

1947년 창설된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콩쿠르’의 올해 피아노 부문 우승자는 18세 한국인 피아니스트 손세혁이었다. 지난 5월 14일(현지시간) 프라하 축제 기간 중 열린 결선에서, 본선에 오른 42명의 참가자 중 최후의 1인이었다. 최근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금호아트홀에서 손세혁과 만났다.
손세혁 피아니스트. 임형택 기자.
손세혁 피아니스트. 임형택 기자.
손세혁은 프라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해 최종 우승과 3개 부문 특별상을 차지했다. 주어진 세 곡 중 평소 가장 사랑하던 곡을 고른 승부수가 통했다.

"스승이신 파비오 비디니 교수님께서 '콩쿠르에서 이기려 하지 말고 음악을 하라'고 하셨어요. 부담감을 내려놓고 좋아하는 곡을 즐기려 노력했어요." 무대에 오른 직후 초반 3분간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긴장했다. 하지만 곧 몰입하며 자신의 음악을 펼쳤다. "2악장은 브람스가 클라라 슈만을 생각하며 쓴 곡인 만큼 사랑의 스토리를 정서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3악장은 지휘자, 오케스트라와 대화하는 기분으로 협연의 맛을 즐겼습니다."

"남자애가 왜 이리 잘 치나"

초등학교 1학년 때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건반을 처음 접했고, 우연한 기회에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 "남자아이가 이렇게 피아노를 잘 치는 건 처음 본다"는 학원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가 인생을 바꿨다.
손세혁 피아니스트. 임형택 기자.
손세혁 피아니스트. 임형택 기자.
이후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 애를 먹었다. 현실적인 면을 우려한 어머니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높은 목표들을 과제로 내줬다. 해내면 피아노를 하는 것으로. 어린 세혁은 이를 악물고 모두 이뤄냈다. 맹장염 수술 후 몸이 채 회복되기도 전에 "피아노를 치러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릴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타고난 천재라기보다, 간절함이 재능을 앞선 케이스다. 2021년 '금호영재콘서트'를 통해 첫 독주 무대를 가지며 본격적인 길을 걸었다.

예원학교 3학년 때 영국 예후디 메뉴인 스쿨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출신 피아니스트 디노라 클린트 선생님은 프로코피예프와 리스트의 매력을 일깨워줬다. 현재는 미국 콜번 스쿨에서 파비오 비디니 교수를, 한국에서는 김종윤 선생님을 사사하고 있다.

두 스승의 스타일은 확연히 다르다. 김종윤 선생이 "영화를 많이 보며 음악의 기승전결을 연주에 적용하라"는 식의 구체적 조언을 한다면, 비디니 교수는 "악보 속 대화를 내레이션처럼 들려주며, 오페라를 상상하라"는 식으로 가르친다. 전혀 결이 다른 두 스승이 그의 연주에 입체성을 더했다.

5년 전 금호영재콘서트 때 키 160cm의 아담한 체구였던 소년은 이제 177cm가 넘는 훤칠한 청년이 됐다. 무대 위에서 무서운 몰입을 보여주지만, 무대 밖 손세혁은 해맑은 소년미가 있다. 쉴 때는 게임과 축구, 수영을 즐기고, NASA가 실시간으로 전송하는 우주 영상을 본다.

"거대한 우주를 보면 나는 한없이 작은 존재라는 걸 깨달아요. 그러면 '무대에서 실수 좀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한국에 오면 외할머니의 된장찌개를 먹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평범한 유학생이기도 하다.

"지루한 연주는 싫어요"
손세혁 피아니스트. 임형택 기자.
손세혁 피아니스트. 임형택 기자.


우승 특전으로 그는 2027년 프라하의 봄 축제 공식 무대에 오른다. 국내서도 공연 스케줄이 여럿 잡혀있다. 동시에 내년부터는 세계 유수의 콩쿠르에 출전, 4년 뒤 쇼팽 콩쿠르도 도전할 계획이다. 꿈의 레퍼토리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4번 전곡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곡. 예핌 브론프만의 연주 영상을 1만 번 이상 돌려보며 동경해온 일본 산토리홀에 서고 싶다는 꿈도 밝혔다.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로는 라두 루푸를 꼽았다. "정말 소극적이시고 은둔형이신데, 한없이 섬세하고 예쁜 소리를 내요. 그러다 브람스를 연주할 때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강렬하죠. 실제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의 반전 매력에 깊은 영감을 받았어요." 그가 가닿고 싶은 소리의 지향점도 이와 닮았다.

"무엇보다 지루한 연주는 하고 싶지 않아요. 연주가 끝난 뒤 집에 걸어가면서 여운이 남는 연주를 하고 싶어요. 바로크부터 현대음악까지 다채롭게 표현하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습니다."

조민선 기자 sw75j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