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대모' 이경숙 "피아노 없으면 생(生) 끝나는 것"
오는 15일 인천시향과 멘델스존 피아노 협주곡 1번 연주
서울대 교수 김규연 "어린 시절 상상력이 연주에 큰 도움"
하반기 프랑스 '뮤직 알프', 스페인 '히혼 페스티벌' 등 참가
두 사람이 한 대의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는 '연탄(聯彈)' 또는 '포 핸즈(four hands)'는 가장 우아하고도 은밀한 방식으로 사랑을 속삭이는 연주법이다. 과거 남녀 간 스킨십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 어깨를 맞댄 두 남녀는 건반 위로 스치는 손등 사이에서 짜릿한 유희를 즐기곤 했다.
이토록 로맨틱한 공간에 연인 대신 모녀가 함께 앉는다면 어떨까. 가장 가깝고도 불가해한 모녀 사이. 서로 닮은 듯 다른 네 손이 그려내는 하모니를 따라가 봤다.
'현실 모녀'의 포 핸즈
지난 8일 서울 강남구 최인아책방에서 피아니스트 이경숙(오른쪽)과 김규연이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사진=문경덕 기자
어버이날인 지난 8일 서울 강남구 최인아 책방. 단정한 숏컷에 올블랙 의상을 맞춰 입은 두 연주자가 한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았다. 한눈에 봐도 꼭 닮은 이들은 '한국 피아노계의 대모'로 불리는 이경숙(81)과 그의 딸이자 서울대 피아노과 교수인 피아니스트 김규연(40)이다.
이날 모차르트 연탄곡을 시작으로 소규모 책방 콘서트를 연 모녀의 대화는 솔직하고도 유쾌했다. 한국 피아노계를 이끄는 거장과 교수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은 평범한 모녀의 모습이었다.
"솔직히 '포 핸즈'는 별로 안 좋아해요. 두 명이 같이 앉으면 자리도 비좁고 연주하기 힘들잖아요. 지난 연습 땐 엄마가 '손을 치우라'면서 제 손을 탁 때리더라고요" (김규연)
친구처럼 스스럼없는 딸의 폭로에 이경숙이 웃으며 맞받아쳤다.
"네 손이 자꾸 내 쪽으로 넘어오니까 그렇지. 내가 칠 자리를 뺏어버리니까!" (이경숙)
모녀 피아니스트 이경숙과 김규연의 네 손./사진=문경덕 기자'피아노 놀이'로 틔운 음악적 상상력
이경숙은 한국 클래식 음악사의 산증인이다. 그는 6·25 전쟁 중 피란지 부산에서 열린 제1회 이화경향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음악 인생을 시작했다. 한국 최초로 베토벤, 모차르트,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전곡을 완주하는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초대 음악원장과 연세대 음악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연세대 명예교수, 서울사이버대 음악학부 석좌교수로 있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김규연은 섬세한 해석과 열정적인 연주로 국내외 무대에서 주목받는 중견 피아니스트다. 한예종 졸업후 커티스 음악원,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 맨해튼 음대 등에서 공부했다. 더블린 국제 피아노 콩쿠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클리블랜드 콩쿠르 등에서 입상한 그는 현재 서울대 피아노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김규연에게 피아노는 '애착 인형'보다 가까운 악기였다. 집안 가득 울려 퍼지는 피아노 선율을 공기처럼 마시고 자란 덕에 네 살부터 피아노를 쳤다.
"항상 음악이 묻어나는 집이었어요. 어릴 때 잠에서 깨면 엄마는 이미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었고요. 집안에서 늘 피아노 소리가 흐르니까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것 같아요." (김규연)
이후 김규연에게는 늘 똑같은 질문이 따라다녔다. "엄마가 이경숙인데 잘 해야 한다는 부담이 크지 않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변의 기대보다 내면에 더 집중했다.
"내가 엄마 딸이라는 이유로 기대하는 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잖아요. 저는 단지 제가 하고 싶어서 피아노를 칠 뿐이었어요. 엄마 딸인데 피아노를 못 치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요. 그런데 어릴 땐 제가 조그만 콩쿠르에서 상을 받으면 엄마보다 더 유명한 줄 알았어요."(웃음)
지난 8일 서울 강남구 최인아책방에서 피아니스트 이경숙(오른쪽)과 김규연이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사진=문경덕 기자
정작 이경숙은 딸이 자신의 길을 따르는 것을 한 번도 바라지 않았다. 피아니스트의 삶이 얼마나 고되고 외로운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딸이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치겠다고 했을 때도 연습을 강요하기보다 그저 놀이처럼 함께 건반을 두드렸다.
"연습하라고 잔소리하거나 야단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장난감처럼 같이 피아노를 치면서 놀았을 뿐이죠. 낮은 음을 들려주면서 '아빠 곰이 말하는 소리 같다'고 이야기해주기도 했고요." (이경숙)
음악을 바라보는 김규연의 남다른 감각도 이런 시간을 거쳐 형성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다양한 상상이 연주에 큰 도움이 됐어요. 요새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테크닉은 점점 좋아지는데, 음악을 음의 나열로만 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상상력으로 음악을 펼쳐나가면 출발점부터 달라져요."
"엄마는 피아노 칠 때 제일 행복해보여요"
김규연은 어릴 적 고사리 같은 손으로 피아노를 두드리던 아이에서 한국 피아노계를 이끄는 주역이 됐다. 최근 그는 국내외 무대와 교단을 오가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오는 30일에는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연주하고, 7~8월에는 프랑스 티뉴의 여름 음악축제 '뮤직 알프', 스페인 '히혼 페스티벌'(Gijon Festival) 무대에 오른다. 이어 대만 타이페이 공연(9월), '첼로의 전설' 아르토 노라스와 듀오 리사이틀(10월), 대전시향 협연(11월), 리사이틀 'Circle' 시리즈의 마지막 공연(12월)을 연다.
이경숙은 딸의 손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게 진짜 '피아노 손'이에요. 말로 설명하진 못하지만, 딱 보면 알 수 있잖아요. 저 손에서 온갖 소리가 다 나와요."
딸이 바라본 엄마의 손은 어떨까. 세월이 묻은 손등에서 애틋함이 우러나오진 않을까.
"저는 엄마 손을 볼 때마다 크고 두꺼워서 참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 누군가 엄마 손을 보고 '부산 어묵' 같다고 하더라고요. 한번 악수해 보세요. 정말 물컹하면서도 속이 꽉 찬 어묵처럼 쫄깃한 느낌이거든요." (웃음)
솔직함에서 나오는 그의 유머 감각은 '모전여전(母傳女傳)'인 게 분명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이경숙 역시 대형 무대에 꾸준히 오르고 있다. 지난달엔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교향악 축제에서 인천시립교향악단(인천시향)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했다. 오는 15일에는 아트센터인천 콘서트홀에서 인천시향과 멘델스존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들려줄 예정이다. "새로운 레퍼토리를 욕심내기보다 이전에 연주한 곡들을 정리하며 디테일을 공부하겠다"는 게 거장의 목표다.
지난 8일 서울 강남구 최인아책방에서 피아니스트 이경숙(오른쪽)과 김규연이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문경덕 기자
"컨디션이 예전 같진 않죠. 근육이 많이 빠졌고 힘도 달려요. 하지만 그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그럼에도 계속 연주하는 건, 무엇보다 제가 피아노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피아노가 없다면 생(生)이 끝나는 거나 마찬가지죠." (이경숙)
이경숙의 변함없는 열정은 딸에게도 큰 자극이 된다. "엄마를 보면 피아노 연습 때가 제일 행복해 보여요. 한국 사회는 나이를 너무 많이 따지는데, 그런 게 중요한 것 같지 않아요. 나이를 떠나 무언가에 계속 빠져 있을 수 있다면 그게 곧 영원한 젊음 아닐까요?" (김규연)
서로에게 전하고 싶은 한마디를 묻자, 김규연은 "건강을 챙기라"는 애정 섞인 평소 잔소리는 잠시 접어두고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계속 열정을 가지고 음악을 하는 모습이 제일 멋있어."
이경숙 역시 딸을 향한 깊은 신뢰를 보냈다. "지금처럼 끊임없이 연구하는 자세로 최선을 다하면 좋겠어."
이날 무대를 가득 채운 건 도파민 보다 긴 여운을 남기는 두 피아니스트의 포근하고도 단단한 호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