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약하지 않았다… 영화적 미장센으로 부활한 오페라 <베르테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연출한
박종원 감독의 시선으로 탄생
끝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은 베르테르
그의 모습에서 비극을 넘어선
인간 존엄의 승리를 목격
박종원 감독의 시선으로 탄생
끝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은 베르테르
그의 모습에서 비극을 넘어선
인간 존엄의 승리를 목격
지난 23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국립오페라단(단장 박혜진)의 올해 첫 정기 오페라 <베르테르>의 막이 올랐다. 이번 작품은 <구로 아리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연출한 영화 감독 박종원의 오페라 연출 데뷔작이다. 그가 무대 위에 빚어낸 베르테르는 나약한 패배자가 아니라, 죽음의 순간마저 자신의 신념으로 선택하는 당당한 인물로 그려졌다.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점은 현대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여주인공 샤를로트의 태도다. 프랑스 오페라의 또 다른 여성 아이콘 <카르멘>이 자신의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내며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자유의 화신’이라면, 샤를로트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비극의 씨앗을 뿌린다.
그는 베르테르에게 명확한 거절도, 온전한 수용도 하지 않는 ‘애매한 여지’를 남김으로써 그를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결국 카르멘이 자유를 갈망하다 죽음을 맞이한다면, 샤를로트는 사회적 책임과 도덕을 선택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베르테르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프랑스 작곡가 쥘 마스네(1842~1912)가 쓴 오페라 <베르테르>는 괴테의 고전을 프랑스 오페라 특유의 섬세한 감정선으로 재해석한 걸작이다. 마스네는 독일적 낭만주의 위에 유도동기를 활용해 치밀한 음악 구조를 덧입혔다.
박종원 연출은 오페라 무대에 자신만의 영화적 시야를 선명하게 투영했다. 그는 신파적 과장을 덜어내는 대신, 인물의 미세한 심리 변화를 추적하는 방식을 택했다. 특히 주인공들의 곁을 그림자처럼 맴도는 두 명의 무용수는 베르테르와 샤를로트의 분열된 자아를 감각적으로 형상화했으며, 장면마다 교차하는 영상미는 인물들의 억눌린 동경을 은유하는 세련된 미장센으로 기능했다.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조명 활용법이다. 아리아가 울려 퍼지는 순간에도 가수 한 명에게 조명을 집중시켜 관객의 시선을 고립시키기보다 무대 전체를 환하게 밝히는 방식을 택했다. 관객이 무대 위 모든 오브제와 공간 전체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조망하게 함으로써,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듯한 시각적 경험을 선사했다.
이번 프로덕션은 최상호 전 국립오페라단 단장이 재임 시절 기획 단계부터 공을 들인 작품이다. 자칫 정적이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고전의 리스크를 떠안고서 이 작품을 선택한 데는 남다른 배경이 있었다.
이번 공연은 박종원 연출가(한예종 명예교수)와 조주현 안무가(한예종 교수)를 필두로, 출연진 상당수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의 실력파들로 꾸려졌다. 특히 A팀 샤를로트 역의 메조소프라노 정주연과 B팀 베르테르 역의 테너 김요한은 최상호 전 단장을 사사한 성악가들이다.
반면 B팀의 테너 김요한은 마치 베르디 오페라 <아이다>에 등장하는 라다메스 장군을 연상시킬 만큼 압도적인 성량과 넘치는 에너지로 무대를 장악하며 또 다른 매력을 뽐냈다. 여주인공들의 기량 비교도 흥미로웠다. B팀의 메조소프라노 카리스 터커가 세련된 음색과 우아한 자태로 귀족적 품격이 느껴지는 샤를로트를 그려냈고, A팀의 메조소프라노 정주연은 절제미 넘치는 표현과 정확한 리듬감을 바탕으로 전막에 걸쳐 단단하고 안정적인 기량을 증명했다.
이번 프로덕션에서 가장 인상적인 발견은 B팀에서 샤를로트의 여동생 소피 역으로 분한 소프라노 홍혜인이다. 그는 단단하면서도 투명하게 빛나는 음색으로 자칫 침잠하기 쉬운 비극적 서사에 싱그러운 생기를 불어넣으며, 관객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특히 1·2·4막에서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사랑의 테마‘에서 첼로 수석 이경진이 빚어낸 서정적 솔로 선율은 객석의 숨소리마저 멎게 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과잉되지 않은 절제미 속에서도 깊고 서늘한 슬픔을 뿜어낸 그의 연주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비극적 정서를 정확히 관통했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