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부족한 스마트폰 부품을 한 시간 안에 조달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세계 어디서든 하루 안에 생산량을 조정할 수 있다. 부품과 원자재를 조달하는 공급망관리(SCM)의 효율성을 극단까지 끌어올린 결과다.
1956년 컨테이너 표준화로 글로벌 물류망이 본격적으로 구축된 이후 세계 기업들은 효율화를 최선의 가치로 놓고 움직여 왔다. 일본 도요타에서 시작된 JIT(just in time·부품 적기 조달)는 세계 제조업의 표준이 됐다.
이 같은 흐름은 70년 만에 중대한 변화를 맞았다. 코로나19 팬데믹과 두 번의 전쟁을 겪고 국가 간 무역전쟁이 심화하자 JIC(just in case·돌발 변수를 대비한 조달)에 신경 쓰는 기업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 무너진 JIT 조건
JIT가 작동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부품과 원자재 운송 시점이 예측 가능하고, 한쪽에서 공급받기 어려워졌을 때 다른 공급원을 찾기 쉬워야 한다. 물류 시스템을 떠받치는 글로벌 무역 규범도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이어야 한다. 1970년대 처음 소개된 이후 점진적으로 적용이 늘어난 JIT가 냉전 종식과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을 기점으로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한 이유다.
하지만 2020년대 들어 환경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이 시작이었다. 당시 국경 봉쇄와 공장 셧다운으로 재고를 최소화한 기업들은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비료부터 자동차까지 줄줄이 생산라인이 멈췄다.
2022년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과 올해 미국의 이란 공격은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에 충격을 줬다. 유가 상승에 이어 해상 운임 급등, 원자재 조달 지연 등이 글로벌 제조업에 타격을 가하고 있다.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 및 무역 정책은 JIT의 마지막 숨통이던 국제 무역규범을 무력화했다. 가장 저렴하게 원자재와 부품을 조달할 수 있는 곳에 공장을 짓는 ‘오프쇼어링(off shoring·해외 생산) 전략’을 흔들었다.
이에 따른 충격은 각종 지표로 드러나고 있다. 우선 뉴욕연방은행이 집계하는 ‘글로벌 공급망 압력지수(GSCPI)’ 등이 오름세를 나타내고 있다. GSCPI는 0을 기준으로 플러스(+)는 부품 및 원자재 공급난이 악화했음을, 마이너스(-)는 호전됐음을 나타낸다. 2023년만 해도 마이너스를 보이던 이 지표는 올 2월 0.49까지 상승했고, 3월에는 1 이상으로 치솟은 것으로 분석된다.
◇ JIC로 생존 해법 찾는 기업
많은 글로벌 기업과 각국 정부는 이미 JIC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비용을 치르더라도 더 많은 재고를 쌓고, 공급처를 가능한 한 다변화하고 있다.
스위스 반도체 부품업체 VAT는 반도체 공정의 핵심 원자재인 헬륨 부족에 직면해 미국 등 대체 공급원을 찾고 있다. 재고도 최대한 확보하기로 했다. 프랑스의 산업용 가스 전문 기업 에어리퀴드는 세계 곳곳에서 헬륨 공급원을 추가로 확보했다. 아르멜 르비외 에어리퀴드 부사장은 “카타르에너지의 불가항력 선언에 대응하기 위해 글로벌 공급망 네트워크를 최대한 가동하고 있다”고 밝혔다.
각국 정부는 원유 공급난에 직면해 각종 석유제품 수출을 막아 국내 재고를 쌓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달 12일 석유 정제연료 수출을 전면 중단한 데 이어 19일에는 인산계 비료 수출도 금지했다. 러시아는 지난달 24일 질산암모늄 수출을 중단했고, 인도도 석유 정제연료 수출 금지를 검토 중이다. 최근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회원국들에 이달부터 가스 저장고를 조기 충전하라고 촉구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정부는 지난달 27일 나프타 수출 통제를 시작했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기업과 국가의 공급망 경쟁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재고를 얼마나 적게 두느냐’에서 ‘충격이 왔을 때 얼마나 빨리 복구할 수 있느냐’로 바뀌고 있다”고 분석했다.
▶ JIT(Just In Time)
부품 및 원자재를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공급받아 제품을 즉시 생산하는 방식. 낭비를 최소화하고 원가를 절감하는 효율을 추구하는 게 특징이다.
▶ JIC(Just In Case)
원자재와 부품 재고를 쌓아 공급망 리스크에 대비하는 생산 방식.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아 생산라인이 멈추는 위기를 예방하는 것이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