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 한 마디 크기의 사진. 그 사진 속의 나는 아무런 고통도 없고 그저 행복해 보인다. 장소는 언제나 여기가 아닌 다른 곳. 과거는 이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 된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

고정된 이미지에서 되살아난 과거는 실제보다 더 진득한 색으로 칠해진다. 거기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존재한 적 없었던 것조차 존재했던 양 착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안에서 머무르려 하는 순간 그 정신은 늙어버린다. 만약 한 나라 전체가 그러고 있다면 그 나라 또한 늙어버린 것이다.
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스틸컷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스틸컷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어떤 영화 속 20세기 중반 미국은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제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는 엉망인 화성에서의 삶처럼 보인다. 반면 어떤 영화 속의 20세기 중반 미국은 우산만 한 모자를 쓰고 우아하게 걷는 여자들과 맞춤 양복을 입고 길거리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물고 고개를 까닥이며 미소 짓는 남자들만 존재하는 <브레이브 뉴 월드>의 과거형 같다. 마치 과거에 존재한 평행 우주처럼, 거기에는 두 개의 미국이 있다.

나는 이야기가 미래를 향한 움직임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설사 그 이야기의 시간대가 과거라 하더라도 그것이 작용하는 힘은 미래로 나아가야 하며, 그 이야기를 읽거나 보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앞으로 밀고 나갈 수 있도록 돕는 힘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 흐르는 동시성

보여지는 것에서 확장된 시각이 삶의 반쪽 면만을 남기고서 지나치게 미화된 그림을 만드는 것과 달리, 청각이 밑그림을 그리고 상상력에 의해 채워진 이미지는 삶의 밝고 어두운 면을 모두 빨아들인다. 소리로 그림을 그리듯 보이지 않는 강렬한 이미지를 내재한 음악들이 있다. 왕가위는 한 인터뷰에서 그런 이미지가 강한 음악을 먼저 고르고 영화를 만든다고 한 적이 있다.

“영화음악은 시각적이어야 한다. 비주얼과 어울려 상승작용을 일으켜야 한다.”[1]

그런 노래들은 노랫말조차 말하는 그대로가 아니다. 사람들을 유혹하려는(Hooking) 노랫말이 단순한 말로 사람들의 머릿속을 사로잡으려는(Hook) 것과 달리, 이런 노래들은 말하는 것과 반대의 것을 말하곤 한다. 니나 시몬의 '필링 굿(Feeling Good)'이 좋은 기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루 리드의 '퍼펙트 데이(Perfect Day)'가 공원에서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고 와인 한잔을 하고 영화를 봐도 사랑하는 상대가 만나주지 않는다면 조금도 퍼펙트해질 수 없는 하루를 말하는 의존증 환자의 이야기이듯, 말하는 그대로가 아닌 그런 음악은 보이지 않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런 음악은 사람들의 플레이리스트에서 사라졌다가도 그 보이지 않는 이미지로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유혹의 손짓을 보낸다. 그 청각의 이미지 속에 몸을 담그고 싶게 만들며, 다시 플레이리스트에 오른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는 감각이 있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 음악의 시간은 다시 흐른다. 노랫말 속의 일은 바로 지금 일어나는 일이 된다.
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스틸컷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스틸컷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왕가위의 영화는 흔히 시각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슬로셔터(Slow Shutter)로 흐트러진 이미지는 절대로 고정될 수 없는 그 시간 그대로를 영화의 시간 속에 남긴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이 시각 언어를 통해 말하는 감독 중 한 명이었다고 기억한다. 그 말은 호흡과 리듬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 간극이 필요하고, 그 영화의 시간은 마치 시계의 초침처럼 덜그럭거리며 더디게 흘러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표면적 기법을 흉내 낸다고 해서 똑같이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의 영화가 소리는 지워지고 리듬이 사라진 단편적 이미지로, 오로지 회화성만 남은 채 소셜 미디어에서 공유되는 것을 볼 때면 반가운 마음도 들지만 오독되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단지 사람들을 사로잡기(Hook)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와 움직이는 그림은 시간과 함께 퇴색될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고유한 리듬으로 발화되지 않은 것을 말하는 영화의 시간은 언제든 다시 흐른다. 그래서 당대의 평가가 좋지 않았던 영화들이 리마스터링과 재개봉을 통해 다시 재평가받는 일이 많은 건 아닐까?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왕가위의 영화 중 성공적인 작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저 특유의 스타일로 시선을 현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또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왜 우리의 삶에 필요한지에 대해 말하는 바로 그런 영화다.

영화의 언어로 편집된 기억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뉴욕을 떠난 엘리자베스(노라 존스)가 300일간의 여정 끝에 결국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로드무비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그녀가 어디에 있든 그곳은 늘 '뉴욕으로부터의 거리'로 표현된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와야 할 곳은 단지 뉴욕이라는 도시가 아니다. 제레미(주드 로)가 운영하는 카페, 즉 제레미라는 '장소화된 인간' 혹은 '인간화된 장소'다. 영화 내내 제레미는 카페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의 첫 챕터, 서로에게 익명인 두 남녀는 모두 과거에 머물러 있다. 남자는 사람들이 남기고 간 열쇠와 그 열쇠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기억함으로써, 또 여자는 이미 떠나버린 남자의 흔적을 쫓으며 과거에 머문다. 화려한 미장센이나 작위적인 연출 없이 마치 보이지 않는 카메라가 두 사람의 시간을 몰래 담아내기라도 한 듯한 이 오프닝은, 언제든 다시 살아나게 될 시간, 보는 이의 눈앞에서 지금 일어나는 일이 될 수 있는 동시성을 지니고 있다.
카페에 있는 제레미(주드 로)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카페에 있는 제레미(주드 로)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엘리자베스가 여행을 떠난 후, 안드레이 타르콥스키가 인용했던 프루스트의 말처럼 영화는 "회상이라는 거대한 건물에 생기를 불어넣는" 작업으로 전환된다. 첫 번째 챕터를 제외한 영화의 대부분은 엘리자베스의 시점이다. 하지만 물리적인 1인칭 시점(POV)이 아니라 그녀의 주관적인 '기억의 POV'다.

기억은 필연적으로 왜곡되고 편집된다. 제레미가 카페의 CCTV 영상을 편집한다고 말한 것처럼, 또 영화가 편집되는 과정처럼 엘리자베스의 기억 역시 잘리고, 또 느려지고 빨라지며 그녀만의 주관적인 리듬으로 이어진다. 수 린(레이첼 와이즈)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자. 마치 고정된 이미지처럼 오픈카 옆에 가만히 서 있는 그 모습을 엘리자베스가 직접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엘리자베스가 제레미에게 띄우는 편지 속 묘사라고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편지 속에서라면, 혹은 주관적인 기억 속에서라면 내가 직접 보지 못한 타인의 뒷모습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마치 시간이 정지되기라도 한 듯 한참 동안 서 있었다고 말이다.
오픈카 옆에 서 있는 수 린(레이첼 와이즈)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오픈카 옆에 서 있는 수 린(레이첼 와이즈)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레슬리(나탈리 포트만)가 리즈에게 재규어를 담보로 돈을 빌려달라고 말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물리적으로는 리즈의 눈이 다리우스 콘지의 카메라가 되어 유려한 곡면의 차체를 그토록 화려하게 훑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오랫동안 꿈꾸던 드림카를 구매하는 순간의 흥분된 마음을 영화로 재구성한다면 가능하다. 그동안 팁으로 모은 돈을 한순간에 탕진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잠식시킬 정도로 화려한 차체에 마음이 이끌린 리즈의 마음은 1초에 24장이 아닌, 240장의 이미지로 느리게 흐르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반면 즐거운 시간은 오히려 빠르게 흘러가곤 한다. 레슬리의 거짓말에 속아 애틀랜타에서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여정은 매우 빠르게 묘사된다. 이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레슬리를 빠르게 용서하고 뉴욕으로 돌아가는 엘리자베스의 행동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해준다.

뉴욕으로 돌아온 리즈는 이제 과거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녀도 자신의 기억을 그녀만의 리듬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또한 로드무비의 형식이다. 여정의 끝에서 인물의 내면에는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레슬리(나탈리 포트만)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레슬리(나탈리 포트만)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지나간 시간을 되찾고 미래의 문을 여는 열쇠

돌아갈 곳을 잃은 많은 현대인과 달리, 엘리자베스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었다. 열쇠 하나하나에 얽힌 이야기를 기억하고 들어주는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리즈와 제레미의 이야기, 또 리즈가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의 에피소드는 거대한 서사나 화려한 후크송에 비하면 쉽게 잊힐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조각들이다.

하지만 그런 평범한 사람들인 우리 또한 지나간 시간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단지 과거를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라며 맹목적으로 추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타인의 삶을 바라보고 나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회상 속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을 넘어 '앞으로 나아가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이야기들은 미래의 닫힌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I don't know how to begin / Cause the story has been told before” (노라 존스의 ‘The Story’ 중)
엘리자베스(노라 존스)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엘리자베스(노라 존스)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노랫말처럼, 이야기는 언제나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기억은 편집되고 왜곡되지만, 지나간 시간에 생기를 불어넣는 '이야기하는 힘'은 그것이 덜그럭거리는 분절된 리듬으로 편집될지라도 그 삶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밀어준다.

언제든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다시 흐르는 시간의 힘을 지닌 음악처럼, 이 영화 역시 내 플레이리스트에 꼭 넣어두고 싶은 작품이다. 비록 지금은 쉽게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언젠가 다시 재발견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영화의 시간은 언제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다시 흐를 것이다. 마치 블루베리 파이 사이로 천천히 녹아내리던 그 하얀 아이스크림처럼.

박정민 칼럼니스트

<참고문헌>
[1] 로랑 티라르 <거장의 노트를 훔치다>, 조동섭 옮김, 나비장책,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