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nude)와 네이키드(naked)의 차이는 무엇일까. 영국의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에 따르면, 네이키드는 ‘옷이 벗겨진 상태’로 노출과 취약함, 당혹과 시선의 폭력을 동반하는 데 반해, 누드는 ‘이상화된 몸’으로 한 사회가 허용하는 제도와 미학이 정제해 놓은 품위의 형태이다. 즉 옷의 유무가 아니라 허가의 유무다. 같은 신체라도 누드는 제도가 승인한 몸이고, 네이키드는 질서 밖으로 튀어나온 몸이다.

최근 아트바젤이 열린 카타르 도하에 다녀왔다. 도하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이 ‘허가의 감각’을, 작품이 아니라 거리에서 먼저 감지했다. 흰 토브를 입은 남자들과 검은 니캅을 써서 눈만 보이는 여자들, 그리고 평상복을 입은 아이들이 한 프레임에 들어온다. 며칠 관찰해 보니, ‘검은 천’이라고 단정하기엔 그 검정에도 밀도와 결이 있다. 실크가 흘러내리고, 벨벳이 빛을 먹고, 레이스가 미세한 경계를 만든다. 여자의 얼굴이 가려지는 만큼 그녀의 눈은 더 크게 강조된다. 눈만 남은 만큼 화장은 또렷해진다. 도하에서는 노출이 “없다”기보다, 노출이 “관리”된다.

아트 바젤 카타르에서 만난 가장 인상 깊었던 카타르인을 꼽자면, 두 왕족 여성이었다. 먼저, 국왕의 누이인 알 마야샤(Al Mayassa) 공주는 전형적인 카타르 왕실의 복장을 입고 공식석상에 등장하였는데, 얼굴을 드러내되 머리카락을 완전히 감싸는 히잡과 주로 검은색 ‘아바야’를 입었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유학한 그녀는 카타르 박물관(Qatar Museums)청의 의장으로, 이번 아트 바젤을 주도한 인물이다. 다음으로, 국왕의 어머니 셰이카 모자(Sheikha Moza)는 카타르 교육위원회를 이끌며 여성의 사회진출과 교육권리를 강력하게 주장해 왔다. 패션 아이콘이기도 한 그녀는 머리만 가릴 뿐 현대 서구의 복장을 하여 샤리아 법의 엄격함을 따르지 않고 세련된 아랍 여성의 리더십을 보여준다.
수크 와키프 전통시장에서 토브를 입은 남자들과 니캅을 하고 유모차를 미는 여자 / 사진=필자 제공
수크 와키프 전통시장에서 토브를 입은 남자들과 니캅을 하고 유모차를 미는 여자 / 사진=필자 제공
이처럼 도하에서 ‘드러냄’과 ‘가림’은 취향이 아니라 통치술에 가깝다. 둘 다 규범의 반대편에 선 예외가 아니라, 규범이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보여주는 ‘공식 언어’다.
아트 바젤 도하가 열린 M7에 참석한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 카타르 국왕과 알 마야샤 카타르박물관청장 / 사진출처. 알 마야샤 인스타그램
아트 바젤 도하가 열린 M7에 참석한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 카타르 국왕과 알 마야샤 카타르박물관청장 / 사진출처. 알 마야샤 인스타그램
이제 이 실루엣을 전시장으로 옮겨보자. 2026년 2월 카타르 도하 미쉐레브 다운타운(Msheireb Downtown Doha)의 M7에서 첫 막을 올린 아트 바젤 카타르(Art Basel Qatar)는 87개 갤러리, 84명의 작가 프레젠테이션을 솔로부스 형식으로 내세웠고, 예술감독 와엘 쇼키(Wael Shawky)가 “Becoming”이라는 큐레이토리얼 주제를 제시했다. 이 구성은 단순한 기획 취향이 아니다. “각 갤러리마다 한 명의 작가”라는 형식은 작품을 통제한다기보다, ‘논란이 되기 쉬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애초에 줄이는’ 리스크 관리 장치로 작동한다. 현대미술의 미덕이 종종 ‘깜짝 놀라게 하기’라면, 카타르는 그 놀라움을 아예 관리 가능한 크기와 형식으로 재단한 것이다.

아트페어의 자유는 법조문보다 먼저 계약서에서 시작된다. 운영 규정, 파트너십, 보험과 운송의 조건, 설치의 디테일이 층층이 쌓여 작품의 가능 범위를 조형한다. 그러한 점에서 검열은 붉은 펜이 아니라, “애초에 가져오지 않는 선택”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어쩌면 종종 벽에 걸린 작품이 아니라, 벽에 걸리지 않은 작품이 말하는 바가 더 클지도 모른다.

행사장에는 여성의 육체성을 전면에 내세운 회화적 누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다만 누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우회했다. 예컨대 사우디 아라비아 작가 마날 알도와얀은 ‘비스듬히 누운 누드’라는 서구 미술사의 전형적 포즈를 호출하면서도, 회화의 직선성을 피하고 린넨이라는 섬유의 물성으로 거리감을 두어 시선의 속도를 늦췄다. 이 작가는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 사우디 파빌리온 작가로 선정되는 등 중동 현대 미술계에서 여성의 서사를 다루는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마날 알도와얀, <비스듬히 누운 누드의 깨어남 III> (The Awakening of the Recline III), 2026. / 사진출처. © Art Basel
마날 알도와얀, <비스듬히 누운 누드의 깨어남 III> (The Awakening of the Recline III), 2026. / 사진출처. © Art Basel
도하에는 ‘거대한 예외’가 있다—데미언 허스트의 <기적의 여정>

그런데 바로 이 도시에는 거대한 예외가 있다. 그리고 그 예외가 공공장소에 서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2005년 알 마야샤 공주의 직접 의뢰로 시작되어 제작과 설치에 무려 2000만 달러가 투입된 데미언 허스트의 <기적의 여정>이 바로 그것이다. 카타르가 문화 강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기획한 핵심 문화 사업 중 하나로 진행된 이 작품은 도하 시내 에듀케이션 시티에 설치되어 있다. 국왕은 칙령으로 카타르 박물관청에 국가 예산을 독점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초법적 전권을 부여하였고, 카타르 박물관청은 연간 약 10억 달러(한화 약 1조 3,400억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자금력을 투입하여 전 세계의 마스터피스를 구입해 오고 있다.
데미언 허스트, <기적의 여정> (The Miraculous Journey), 2013년, 청동, 5~14m, 시드라 메디컬 센터, 도하 / 사진출처. © Qatar Museums
데미언 허스트, <기적의 여정> (The Miraculous Journey), 2013년, 청동, 5~14m, 시드라 메디컬 센터, 도하 / 사진출처. © Qatar Museums
어마어마한 크기의 이 작품은 정자가 난자를 만나 수정되고, 자궁에 착상하여 태아가 발달하고 출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14점의 대형 브론즈 조형물로 형상화하였다. 가까이 가 보니 너무나도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그 과정을 묘사하고 있음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마지막 작품은 14m 높이의 해부학적으로 사실적인 남자 아기의 나체 그대로였다.
데미안 허스트, <더 미라큘러스 저니> (The Miraculous Journey), 설치된 14개의 거대한 청동 조각 시리즈 중 하나. / 사진=필자 제공
데미안 허스트, <더 미라큘러스 저니> (The Miraculous Journey), 설치된 14개의 거대한 청동 조각 시리즈 중 하나. / 사진=필자 제공
그런데 이 작품은 2013년 설치되었으나 보수층의 엄청난 반발로 가림막에 가려져 있다가 2018년에 다시 공개되었다고 한다. 카타르 당국과 알 마야샤 공주는 예술이나 성이 아니라, 과학과 코란의 가르침으로 이 작품을 방어하였다. 이 조형물은 여성 병원인 시드라 의료센터의 앞에 있어 인체의 신비와 생명 탄생의 과학적 과정을 보여주는 교육적 전시물임과 동시에, 코란에 묘사된 태아의 발달단계를 이용하여 생명을 창조한 신의 기적을 시각화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금기를 깼다. 욕망의 언어로 읽히면 네이키드가 되지만, 의학·교육·생명·공공성의 언어로 번역되면 누드가 되는 것이다. 허스트는 “중동에 설치된 최초의 누드 조각”이라는 점에 큰 자부심을 드러내었다고 한다. 다만 허가된 도발인 거대한 태아 조각상은 생명의 경이로움을 찬양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 생명이 누려야 할 보편적 인권과 자유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은 아닌지(카타르 형법은 혼외자 출생 행위와 동성애를 강력하게 처벌한다) 의문이 든다.

1863년 파리: 살롱전은 ‘미술관’이 아니라 ‘국가가 승인한 시장’이었다

도하의 문턱이 특별해 보인다면, 1863년 파리로 돌아가 보자. 1863년, 프랑스 파리에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살롱전에서 거부되었고, 나폴레옹 3세가 마련한 낙선전(Salon des Refusés)에서 웃음과 스캔들의 중심이 되었다. 그림 속 나체의 여성은 남성들과 함께 야외에서 피크닉을 즐기며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반면 같은 해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은 살롱전에서 그랑프리를 받았고, 나폴레옹 3세가 구매했다고 전해진다. 물결이 잔잔히 이는 바닷가에서, 이제 막 탄생한 비너스가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육감적인 하얀 나체를 드러내며 긴 머리를 풀고 누워있다. 둘 다 ‘벗은 몸’을 그렸는데, 하나는 여신 비너스였기에 품위있는 ‘누드’였고 다른 하나는 일반 여자였기에 불온한 ‘네이키드’였던 것이다.

차이는 벗음이 아니라 맥락이었다. 벗은 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신화의 가면 없이 ‘동시대의 여자’가 관람자를 정면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다시 말해 살롱은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라, 국가가 취향과 시장을 승인하는 제도였고, 그 승인 메커니즘이 누드와 네이키드를 갈랐다.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1년, 208 x 264.5 cm,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파리 / 사진출처. Google Art & Culture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1년, 208 x 264.5 cm,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파리 / 사진출처. Google Art & Culture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1863년, 130 x 225cm,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 미술관, 파리 / 사진출처. Google Art & Culture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1863년, 130 x 225cm,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 미술관, 파리 / 사진출처. Google Art & Culture
2023년 플로리다와 피렌체: 다비드는 누드인가 네이키드인가

미국에서도 이러한 문턱은 작동한다. 2023년 플로리다의 한 기독교계 초등학교에서 6학년 미술수업 시간에 <다비드> 조각상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이 조각상은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의 청년 시절을 구현한 것으로, 이탈리아 미술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그런데 일부 학부모들이 포르노가 아니냐며 항의하였고 급기야 교장은 사임했다. 이 사건은 “미국은 보수적이고 유럽은 관대하다” 같은 문화비평의 문제가 아니다. 예술법적으로 보자면 핵심은 학생의 보호라는 교육기관의 공공성과 예술 교육에 있어 표현의 자유의 경계가 어떻게 결정되는가다. 같은 조각상이 미술관에서는 교양의 상징이지만, 교실에서는 ‘사전 고지’, ‘학부모 동의’ 같은 절차적 장치의 유무에 따라 전혀 다른 법적·정치적 지위를 얻는다. 즉 누드는 작품의 속성이 아니라, 학교·미술관·아트페어라는 기관의 절차가 부여하는 지위다.
미켈란젤로, 〈다비드〉, 1501-1504년, 카라라 대리석, 517 x 199 cm, 아카데미아 미술관, 피렌체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미켈란젤로, 〈다비드〉, 1501-1504년, 카라라 대리석, 517 x 199 cm, 아카데미아 미술관, 피렌체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도하에서 벌어지는 일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서구 미술사의 오래된 문턱이 다른 제도 환경에서 다시 작동하는 방식일 뿐이다. 결국 도하에서 확인한 것은 누드의 ‘허용 여부’가 아니라 누드가 허용되기 위한 서사적 또는 제도적 조건이었다. 무엇이 전시되었는가보다, 무엇이 전시될 수 없었는가가 더 정확한 자료가 된다. 누드와 네이키드는 작품의 속성이 아니라 권력과 관습이 부여하는 해석의 지위다.

어쩌면 우리가 마주한 것은 신체가 아니라 문턱일지 모른다. 누드가 누드로 남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보이지 않는 문턱. 그리고 그 문턱이 자연스러워 보일수록, 제도의 힘은 더 강해진다.

김현진 법학자•인하대 로스쿨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