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겨울은 어둡고 길지만, 정원 가꾸기에 진심인 영국인들에게 겨울 끝자락은 설렘 가득한 계절이다. 겨우내 비를 맞으며 젖었다 얼기를 반복한 땅을 새로 일구고 올 한 해는 어떤 정원을 꾸며볼지 행복한 고민을 시작하는 시기다. 요즘에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식물을 찾아보고 공부하며 사진으로 남기지만, 사진이 발명되기 이전 영국인들은 어떻게 식물을 연구하고 기록했을까? 이번 글은 영국의 큐 왕립 식물원(Royal Botanic Kew Gardens, 이하 ‘큐 가든’)과 이곳의 소장품을 통해 과거 영국인들의 식물 사랑을 살펴보고자 한다.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큐 가든은 런던 서쪽 리치몬드 공원(Richmond Park)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약 40만 평(132ha)에 달하는 면적을 지닌 큐 가든은 1700년대 초반 헨리 카펠 남작(Henry Capell)이 소유하던 정원을 당시 조지 3세의 어머니인 아우구스타 비와 건축가 윌리엄 챔버스를 주축으로 발전시키며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큐 가든의 팜 하우스(Palm House). / 이미지 출처. 큐 가든
큐 가든의 팜 하우스(Palm House). / 이미지 출처. 큐 가든
한 개인의 정원에서 출발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면적은 점차 확대되었고 식물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특히 대항해 시대를 거치며 수많은 외래 식물이 영국으로 유입되었는데, 이를 단순히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해야할 귀한 자료로 여겨졌다. 이러한 방대한 데이터를 보존하기 위해 당시 실력 있는 화가들을 동원해 식물 세밀화(Botanical Illustration)를 제작하게 했다. 이 도판들은 사진이 담아내지 못하는 식물의 세부적인 특징들을 하나의 그림에 모두 응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단순히 외형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식물의 단면, 뿌리의 구조, 꽃과 열매의 변화까지 상세히 담았기에 이는 오늘날의 식물 보고서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마리안 노스 갤러리. / 이미지 출처. 큐 가든
마리안 노스 갤러리. / 이미지 출처. 큐 가든
이 집요한 기록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 바로 마리안 노스 갤러리(Marianne North Gallery)다. 1882년에 개관한 이 갤러리는 당시 여행가였던 마리안 노스가 전 세계를 홀로 여행하며 그린 방대한 양의 유화를 공간 전체에 빼곡히 전시한 곳이다. 800점 이상의 식물화에 둘러싸여 있으면 마치 식물 백과사전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당시의 전통적인 식물화가 대상을 이상적으로 배치하거나 옅은 수채화 배경 속에 그리는 방식이었다면, 마리안은 달랐다.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식물이 성장하는 그대로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그려내기 위해 노력했고, 그녀의 캔버스 속에서 식물은 그 자체가 그림의 주인공이었다.
네펜데스 노시아나(Nepenthes northiana), 마리안 노스. / 이미지 출처. 큐 가든
네펜데스 노시아나(Nepenthes northiana), 마리안 노스. / 이미지 출처. 큐 가든
특히 그녀가 보르네오에서 발견해 그린 식물인 ‘네펜데스 노시아나(Nepenthes northiana)’는 마리안의 기록을 향한 집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식물은 당시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미등록 식물이었지만 마리안 덕분에 세상에 처음 알려졌고, 그녀의 이름을 따 공식적인 학명이 등록되었다. 이처럼 그림이라는 매체가 단순히 사실을 옮기는 수단을 넘어, 대상을 발견하고 그 역사적 존재 가치를 확립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큐 가든 한편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방대한 식물학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큐 가든 도서관(Library and Archives)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30만 권 이상의 도서와 20만 점의 예술품이 소장되어 있다. 2000년 가까운 시간을 넘나드는 아카이브는 식물 명명, 분류, 용도, 생태, 보존, 전 세계의 야생 식물까지 그야말로 식물에 관한 모든 것이 모여 있는 정보의 바다다. 가장 오래된 실물 아카이브는 13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며, 이외에도 고대 시대 자료의 디지털 카피 또한 보관되고 있어 각기 다른 시기의 다양한 지식을 탐험해볼 수 있는 곳이다.
커티스 식물 잡지의 내부 이미지. / 이미지 출처. 큐 가든
커티스 식물 잡지의 내부 이미지. / 이미지 출처. 큐 가든
이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아카이브를 꼽는다면 단연 ‘커티스 식물 잡지(Curtis's Botanical Magazine)’일 것이다. 이 잡지는 1787년 윌리엄 커티스가 창간한 이래 현재까지 계속 발행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발간 중인 잡지다. 식물과 원예에 대한 각종 정보를 비롯하여 역사, 보존, 생태학 등 다양한 주제를 통해 대중들에게 식물학 지식을 전파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바리움(Herbarium). / 이미지 출처. 큐 가든
하바리움(Herbarium). / 이미지 출처. 큐 가든
도서관과 마리안 노스 갤러리가 식물을 기록하고 있다면, 실제 식물을 물리적으로 박제하고 보존하는 곳 또한 큐 가든에 위치하고 있다. 바로 ‘허바리움(Herbarium)’이다. 허바리움이란 식물 표본을 건조시킨뒤 보존해서 연구하는 식물 표본집을 말한다. 1852년에 설립된 이 건물은, 현재는 관람객에게 공개되지 않은 비개방 수장고이며, 이곳에는 170년 넘게 수집해온 약 700만 점 이상의 식물 표본이 잠들어 있다. 특수 제작된 중성지에 고정되어 수백 개의 진열장 안에 질서 정연하게 분류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표본은 1696년 4월 22~27일에 수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찰스 다윈의 허바리움. / 이미지 출처. 큐 가든
찰스 다윈의 허바리움. / 이미지 출처. 큐 가든
허바리움에서 가장 상징적인 소장품이라하면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식물 표본 컬렉션일 것이다. 다윈이 갈라파고스 제도, 티에라 델 푸에고 등을 오가며 1400종의 식물 표본을 직접 수집했고, 그 중 450종이 큐 가든에 보관되어 있다. 표본 위에는 다윈의 자필로 추정되는 채집 번호, 장소 등이 적혀 있고, 이러한 경험은 ‘종의 기원’이라는 거대한 이론을 뒷받침한 물리적 토대가 되었다.

큐 가든의 방대한 식물 데이터는 과거의 유산을 보존하는데 머물지 않고, 디지털화 프로젝트를 통해 자료를 영구화하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밀레니엄 종자 은행(Millennium Seed Bank)으로 확장되어, 식물의 씨앗을 특수한 수장고에 보존하여 미래의 재난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

인간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정과 이를 잊지 않으려는 본능으로 기록을 남긴다. 기록을 하지 않으면 기억 속에서 사라지겠지만, 기록된 것은 언젠가 다시 피어날 기회를 얻는다. 이번 봄 큐 가든을 방문한다면 마주하는 풍경이 단순한 자연이 아닌 누군가가 지켜낸 거대한 아카이브라는 점을 상기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박소연 테이트 미술관 수장고 코디네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