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6구, 생제르망데프레와 오데옹 사이 보자르 거리(Rue des Beaux-Arts). 미술학교와 화랑이 밀집한 이 거리에 신기한 행사가 열렸다. LVMH 하이 주얼리 메종 레포시(Repossi)의 초대였지만, 문을 열고 들어선 공간은 익숙한 주얼리 행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초대받은 이들은 디자이너, 아티스트, 컬렉터 등 아트 페어나 패션 위크에서 만날 법한 인물들. 무겁고 격식을 갖춘 하이 주얼리 이벤트가 아니라 갤러리 오프닝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이게 정말 주얼리 브랜드의 행사가 맞을까 하는 생경함 속에서, 레포시가 꺼내려는 이야기를 살펴봤다.
레포시(REPOSSI), 크로스비 스튜디오와의 새로운 협업 공개 / 사진제공. 레포시(Repossi)
레포시(REPOSSI), 크로스비 스튜디오와의 새로운 협업 공개 / 사진제공. 레포시(Repossi)
방돔 광장을 박스에 담다

이번 프로젝트는 크로스비 스튜디오(Crosby Studios)와의 협업으로 완성됐다. 2014년 디자이너 해리 누리예프(Harry Nuriev)가 설립한 크로스비 스튜디오는 파리와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실내 건축·디자인 스튜디오로, 공간 디자인과 현대미술, 브랜드 프로젝트를 넘나드는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번 협업은 레포시가 파리 방돔 광장에 플래그십 부티크를 연 지 40주년을 기념하는 글로벌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장이다. 크로스비 스튜디오는 방돔 광장과 레포시의 역사, 그리고 정체성을 자신들만의 시각 언어로 풀어내는 역할을 맡았다.

크로스비 스튜디오의 작업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은 ‘트랜스포미즘(Transformism)’이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대신, 이미 존재하는 오브제의 의미와 쓰임을 바꾸어 전혀 다른 감각을 끌어내는 방식이다. 이번 설치에서 방돔 광장은 바라보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질문으로 다뤄진다. 스튜디오에는 방돔 광장을 닮은 주얼리 박스 형태의 오브제가 공간 한가운데 놓였다. 그 안에는 교환과 놀이를 상징하는 포커 칩과 주사위, 거울, 버튼 등을 담아 기존의 주얼리가 상징하는 바와 럭셔리의 개념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한다. 장신구를 소유의 의미가 아니라 문화적인 기호이자 사유의 오브제로 확장하는 시도다. 해리 누리예프는 “의미는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며, 아름다움은 종종 간과된 지점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레포시와 크로스비 스튜디오는 ‘이미 있는 것을 다시 만든다’는 점에서 닮았다. 하나는 전통적인 주얼리의 형식을, 다른 하나는 공간과 오브제를 다루면서, 기원을 존중하되 그 위에 새로운 감각을 계속해서 덧입힌다. 이번 협업에서 레포시는 ‘입는 예술(Art à Porter)’라는 브랜드의 비전을 주얼리를 넘어, 하나의 공간 경험으로 확장해 보여주고 있다.
레포시(REPOSSI), 크로스비 스튜디오와의 새로운 협업 공개 / 사진제공. 레포시(Repossi)
레포시(REPOSSI), 크로스비 스튜디오와의 새로운 협업 공개 / 사진제공. 레포시(Repossi)
왕실의 반지에서 현대의 아이콘까지

레포시의 역사는 1957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시작됐다. 창립자 콘스탄티노 레포시는 금세공 장인 집안에서 자라며 기술과 미학이 결합한 ‘메종’의 기틀을 닦았다. 2세대 알베르토 레포시는 1970년대 말 모나코 왕실의 공식 주얼러로 자리 잡으며 브랜드를 국제 무대로 끌어올렸고, 1986년 파리 방돔 광장에 입성하며 메종의 입지를 다졌다. 현재는 LVMH 산하에서 헤리티지를 유지하면서도 실험을 멈추지 않는 하우스로 평가받는다.

1997년,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의 마지막 반지로 알려진 ‘디 무아 위(Dis-Moi Oui)’는 ‘나에게 예스라고 말해줘’라는 의미로 레포시라는 이름이 전 세계에 각인된 계기였다. 도디 알 파예드가 그녀에게 청혼하기 위해 사고 직전 방돔 부티크에서 직접 수령한 것으로 알려진 이 반지는, 넷플릭스 시리즈 <더 크라운>에서 청혼 반지로 등장하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가업을 잇는 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가이아 레포시는 건축적인 선과 조각적 구조를 주얼리에 담아 메종의 유산을 현대적으로 재정의했다. 한국에서는 지드래곤의 ‘애착 반지’로 알려지며, 패션·주얼리 애호가들 사이에서 '요즘 가장 젊은 하이 주얼리'로 통한다.
장인의 작업 장면 / 사진제공. 레포시(Repossi)
장인의 작업 장면 / 사진제공. 레포시(Repossi)
블라스트, 색채가 터지는 순간

이번 전시 이후, 레포시의 최신 하이 주얼리 컬렉션 ‘블라스트(Blast)’가 공개됐다. 블라스트는 아프리카 마사이족 장신구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컬렉션으로, 손으로 조각한 듯 이어지는 황금의 실이 특징이다. 올해 1월 파리 오트 쿠튀르 위크에서 공개된 ‘스플래시 오브 컬러(Splash of Colours)’는 기존의 조형미에 강렬한 색채를 더했다.

레포시는 이번 컬렉션에서 두 가지 색채 대비를 제안한다. 만다린 가넷과 피치 투르말린 등이 빚어내는 따뜻한 오렌지 계열, 그리고 사파이어와 탄자나이트가 그려내는 차갑고 깊은 블루 계열이다.

레포시가 색채에 접근하는 방식은 장식을 넘어 메종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에 가깝다. 색이 전달하는 직관적인 감각과 에너지에 집중하며, 하이 주얼리에서 색채가 맡았던 전통적인 역할을 새롭게 정의한다.
[좌] Pair of Blast Spiral hoop earrings in pink gold  [우] Blast ring in white gold / 사진제공. 레포시(Repossi)
[좌] Pair of Blast Spiral hoop earrings in pink gold [우] Blast ring in white gold / 사진제공. 레포시(Repossi)
하이 주얼리의 보법이 달라지다

전통적인 하이 주얼리 브랜드가 브랜드를 보여주는 방식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정교한 조명 아래 반듯하게 진열된 유리 케이스와 흰 장갑을 낀 직원의 정중한 환대는 럭셔리 하우스의 권위를 나타내는 오랜 공식이었다.

레포시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하이 주얼리의 전형적인 공식을 벗어났다. 보자르 거리 크로스비 스튜디오에는 쇼케이스도, 실제 제품도, 의식적인 제스처도 없었다. 대신 포커 칩과 주사위가 자리 잡고, 방돔 광장을 닮은 박스 오브제가 럭셔리에 질문을 던진다. 보석은 이제 ‘누가 가졌는가’를 증명하는 수단을 지나,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가’를 묻는 매개가 된다.

방돔 광장 입성 40주년, 레포시가 이번 협업은 앞으로 하이 주얼리가 어떤 미래를 향해 나아갈지 짐작하게 한다. 이제 수많은 브랜드가 경험의 가치를 외치지만, 현대 예술의 언어를 빌려 하이 주얼리의 관습 자체를 재정의하는 레포시의 행보는 분명 다르다. 그 아방가르드한 실험이 앞으로 어디까지 확장될지, 메종의 다음 장이 더 궁금해지는 이유다.

파리=김인애 럭셔리&컬쳐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