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티 한 잔에 담긴 중국 고전, 패왕차희
전통 서사와 메뉴 스토리텔링으로 중국 내 급성장
경극 배우 ‘데이’로 분한 장국영이 무대 위에서 우미인을 연기하던 그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그 눈빛을 쉽사리 잊지 못할 것이다. 1993년 천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霸王別姬)>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항우와 우미인의 2천 년 된 서사를 장국영의 얼굴로 세계에 각인시켰다. 국내 첫 개봉 30년이 지난 2024년, '디 오리지널' 버전으로 다시 한국 극장을 찾았을 때도 관객들은 기꺼이 자리를 채웠다. 장국영의 이름 앞에서라면 세대도, 시간도 장벽이 되지 않는다.
그 '패왕별희'의 이름을 슬쩍 비튼 브랜드가 있다. ‘별희(別姬)’의 자리에 ‘차희(茶姬)’를 앉힌 것—세 번째 글자 하나가 바뀌었을 뿐이지만, 그 치환에는 2천 년의 서사를 현대 소비문화로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2017년 윈난(云南)에서 탄생한 밀크티 브랜드 ‘패왕차희(霸王茶姬)’의 이야기다.
[좌] 영화 <패왕별희> 포스터 [우] <패왕별희>와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CHAGEE 포스터 / 사진출처. CHAGEE 위챗 오피셜 계정‘CHAGEE’라는 이름이 탄생하기까지
'패왕차희(霸王茶姬)'의 초기 영문명은 중국어 명칭의 발음인 병음을 그대로 옮긴 'BaWangChaJi'였다. 그러나 마지막 글자 '희(姬)'의 병음 'JI'를 발음이 유사한 'GEE'로 바꾸어 'CHAGEE(차지)'로 변경했다. 'CHAGEE'는 충전을 뜻하는 영어 'Charge'와 발음이 맞닿아 있어, 달달한 밀크티로 에너지를 채운다는 브랜드 콘셉트를 자연스럽게 함축한다. 신중국식(新中式) 프리미엄 차를 표방하는 CHAGEE의 정체성은 이름에만 그치지 않는다. 브랜드 포스터에는 카르스트 산수와 대나무 뗏목, 청화백자 문양의 컵과 전통 목조 건축의 문살이 등장한다. 중국 고전 회화를 연상케 하는 이 이미지들 속에서 CHAGEE가 추구하는 '동방의 미(美)'가 오롯이 드러난다.
동방의 미를 강조하는 CHAGEE 밀크티 포스터 / 사진출처. CHAGEE 위챗 오피셜 계정
그러나 이름만큼 출발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2013년 후난성 창사(长沙)에서 탄생한 차안열색(茶颜悦色)은 전통 중국 그림을 입힌 패키지와 창사 한정 메뉴로 '중국풍 밀크티'의 원조 격으로 자리 잡은 브랜드였는데, CHAGEE가 영업 초기 이와 유사한 전통 마케팅을 구사하며 브랜딩 모방 논란에 휩싸인 것이다. 로고 디자인이 명품 브랜드 디올의 토트백을 연상케 한다는 지적도 뒤따랐다. 그럼에도 CHAGEE는 '동방의 차로 전 세계 친구들을 만난다(以东方茶, 会世界友)'는 모토를 일관되게 밀어붙였고, 그 고집은 숫자로 증명되었다. 2024년 말 기준 중국 내 점포 수 6,000곳, 같은 해 영업 수익 200억 위안(한화 약 4조 2천억 원) 돌파는 구설수를 딛고 일군 전례 없는 성과였다.
출시 1년 만에 2억 3천만 잔이 팔린 백아절현(伯牙绝弦)은 CHAGEE의 시그니처 메뉴다. '백아절현'은 춘추시대 음악가 백아(伯牙)가 자신의 연주를 온전히 이해해준 나무꾼 종자기를 잃은 슬픔에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다는 고사에서 비롯한 말로, '음을 알아주는 친구'를 뜻하는 지음(知音)이라는 단어의 어원이기도 하다. 조금은 과한 듯싶다가도 음료 한 잔에 서사를 부여하는 이 스토리텔링은 중국 소비자들의 마음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단짝끼리 컵을 나란히 들고 SNS에 올리는 '찐친 인증' 트렌드로 이어지며, '백아절현'은 단순한 음료를 넘어 하나의 문화적 코드가 되었다.
[좌] 고전 이야기를 살린 백아절현 밀크티 [우] 복숭아 꽃이 만발함을 알리는 춘일도도 음료수 / 사진출처. CHAGEE 위챗 오피셜 계정
메뉴판 전체가 고전의 향을 머금고 있다. 우롱 밀크티에 꽃 향을 더한 계복난향(桂馥兰香)은 계화와 난초의 이름만으로도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백무홍진(白雾红尘)은 흰 안개와 붉은 먼지라는 뜻 그대로 중국 10대 명차인 대홍포(大红袍)의 깊은 향을 담아낸다. '청말관음'(青沫观音)은 철관음(铁观音) 특유의 진하고 깔끔한 맛을, 춘일도도(春日桃桃)는 중국 최초의 시가 총집 『시경(诗经)』의 '복숭아꽃이 만발하네(桃之夭夭)'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음료로 소개된다. 고전 시구를 음료의 이름으로 불러내는 방식은 소비자는 음료를 주문하는 동시에 수천 년의 문화적 맥락을 손에 쥐는 셈이다.
고전의 향을 한 잔의 음료에 담아온 CHAGEE가 이제 서울로 온다. 말레이시아·태국·싱가포르 등지에서 현지인들의 일상으로 빠르게 스며든 이 브랜드의 한국 진출은 단순한 음료의 상륙이 아니다. 장국영의 이름을 기억해온 소비자에게,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서사의 연장선으로 읽힐 수 있다. 브랜드 이름에 새긴 패왕의 기억에서, 거문고 줄을 끊은 슬픔을 담은 시그니처 메뉴에서, 산수풍경을 배경으로 한 포스터에 이르기까지, CHAGEE는 중국의 고전 문화를 소비의 언어로 번역해왔다. 밀크티 한 잔을 손에 쥐는 순간, 소비자는 수천 년의 시간과 마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