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도 눈밭서 건진 인생의 알맹이…여행은 멀고 미술관은 가깝다
[arte] 임지영의 예썰-재밌고 만만한 예술썰 풀기
북해도 오비히로 시립 미술관
북해도 오비히로 시립 미술관
모든 관계가 껍데기 같았거든요. 만나면 시답지않은 말들만 하고요. 그런데 알맹이를 얻은 것 같아요. 너무 감동이에요.
북해도 예술 여행을 다녀왔다. 겨울의 북해도는 그 자체로도 예술이지만, 인간은 눈밭에 홀로 선 나무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다. 처음에 우리는 예의 있는 미소를 띠며 이만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잠깐의 동행일 뿐 우린 낯선 타인들이잖아요'라며 경계하면서. 그런데 여행 마지막 날, 이번 팀의 유일한 청년이 저리 말한 것이다. 인생의 알맹이를 얻어간다고.
작년에 서유럽, 미 동부, 일본 등 생의 역마를 타고 지구 곳곳을 다녔다. 좋고 멋지고 아름다운 곳을 열심히도 찾아다녔는데, 잔뜩 모은 굿즈들만 그 시간을 증명할 뿐, 지나간 여행은 돌아오지 않는다. 여행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의 미학이다. 일상에서 아득해지는 경험, 삶의 풍경이 송두리째 바뀌는 변화, 의도적으로 삶의 변수를 온몸으로 맞닥뜨리는 일이다.
이때 더 잘 보인다. 멀리 있으니 알게 되는 것들. '뭘 그리 아등바등해. 그럴 수도 있지. 그냥 넓게 봐. 크게 생각해.' 이렇듯 여행은 내 품을 키운다. 상황에 담대해지고 관계에 유연해지고. 그러고 보니 여행과 미술관은 무척 닮았다. 낯선 경험 속에 스스로를 놓아주고,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하고, 마음 깊은 곳을 길어 올려 가만히 꺼내 보게도 한다.
이번 여행에서 '결정적 순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처럼 나만의 결정적 순간을 이야기 해보자고. 밀레가 있는 미술관에 설국의 근사한 풍경, 바닷가를 끼고 달리는 해안 열차와 오호츠크해를 가로지르는 쇄빙선까지. 너무 멋진 경험들을 했으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고른 결정적 순간들은 아름다운 풍경이나 근사한 장면이 아니었다. 어쩌면 구도도 어정쩡하거나 얼핏 보면 이게 뭐지 싶은 순간. 신기하게도 모든 순간에 사람, 우리가 들어 있었고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전하고 싶은 나의 마음이 들어 있었다.
아니다. 다 그런 거라고 심드렁하긴 싫다. 화려한 무대 아니어도 각자의 삶은 유일한 인생 독무대. 웃고 울고 쓰러져도 내 무대는 내가 만든다. 때로 누군가를 받쳐주는 역할도 하고, 병풍처럼 그냥 서있을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이 주는 모든 역할엔 의미가 있다. 그저 그때에 알맞게 살아내고 집에 돌아와 향이 좋은 비누칠을 하고 뜨거운 밀크티를 마시고 읽다만 책을 펼치고 아, 음악이 빠질 수 없지. 요즘은 임윤찬의 새 레퍼토리가 좋다.
여행에서 돌아오며 우리는 모두 어딘가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사회에서라면 하지 않을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하고, 한 번도 하지 못했던 고백도 스르륵 하고, 그야말로 너무 따뜻한 한 팀이 됐다. 최고의 여행은 사람으로의 여행이란 말, 완벽하게 동의한다. 껍데기 같은 세상이지만 생의 알맹이는 도처에 있다. 다만 그것을 꺼낼 계기가 별로 없는 것뿐. 미술관도 일상을 벗어난 잠시의 여행과 같다. 나의 알맹이를 찾고 싶다면 한나절의 미술관, 그리고 나에게로의 여행이면 충분하다.
임지영 예술 칼럼니스트•(주)즐거운예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