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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쓰레기? 오래된 상상력?…피에르 위그와 '베를린 논쟁'
[arte] 변현주의 Why Berlin
불확정 상태는 미술 맥락에서 경험 가능할까
피에르 위그의 베를린 전시 <Liminals>
불확정 상태는 미술 맥락에서 경험 가능할까
피에르 위그의 베를린 전시 <Liminals>
“현대미술은 어렵다.” 큐레이터로서 일하며 가장 흔하게 들어온 말이다. 20여 년 가까이 미술계에서 일을 해오면서도, 여전히 개인적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작품들을 접하기에 그러한 반응에 충분히 공감한다. 최근 미술관에서는 쉬운 언어로 쓰인 설명문을 제공하기도 하고,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같은 소셜 미디어에서 미술을 대중 친화적 언어로 소개하는 인플루언서들이 활동하는 등 현대미술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시도가 다각도로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현대미술은 여전히 어렵다. 바로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 현대미술이기 때문이다.
Pierre Huyghe, Liminals, 2025. Film still. Commissioned by LAS Art Foundation and Hartwig Art Foundation. Courtesy the artist. © Pierre Huyghe / VG Bild-Kunst, Bonn, 2026.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 1962~)는 이 질문을 예술적 실천의 중심에 두고 탐구해온 작가이다. 무엇이 미술로서 인식되고, 어떤 형식이 미술이라는 범주에 수렴될 수 있는지, 그는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아직 도래하지 않았거나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의 상태를 설정하고 실험해왔다. 그의 전시에서 환경과 시간, 비인간적 요소들은 결합된 하나의 상태를 형성하고, 관객은 이를 해석하는 주체라기보다 그 상태에 노출된 존재로 위치 지어진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현대미술의 경계에 대한 질문이 다시 요구되는 오늘날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그렇기에 신작을 선보이는 베를린 베르크하인 할레(Halle am Berghain)에서의 전시 《Liminals(경계들)》 역시 그동안의 질문을 갱신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했다.
피에르 위그. / 사진. © Ola Rindal
이번 전시는 분명 하나의 상태를 만들어낸다. 과거 발전소였던 베르크하인의 약 18m에 달하는 층고와 거대한 공간은 화이트큐브와 달리 원초적인 방식으로 불확정성을 드러내는 물리적 조건으로 작동한다. 한 발자국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운 공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감각되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진동과 몸을 통과하는 사운드이다. 대형 정사각형 스크린에는 특정한 서사 없는 영상이 상영되고, 관객은 이를 ‘본다’기보다 그 안에 놓이게 된다. 이 전시는 이해와 해석을 전제로 한 감상을 거부하며 상태 그 자체를 노출시키는 환경으로 기능한다.
Halle am Berghain. / © Stefan Lucks. Courtesy the photographer and Berghain Ostgut GmbH.
그러나 이 지점에서 하나의 전제가 필요해진다. 작가가 말하는 불확정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상태는 현실로부터 도피할 때가 아니라 현실에 발을 딛고 있을 때 의미를 지니며 다시 현실을 갱신할 수 있는 동력이 된다는 점이다. 이 ‘상태’가 현실과의 긴장을 상실하는 순간, 그것은 가능성의 확장이 아니라 자기 반복의 위험을 안게 된다.
《Liminals》는 바로 여기에서 논쟁을 촉발한다. 위그는 이번 전시에서도 저작자의 주체성을 후퇴시키고, 시스템과 환경, 비인간적 조건이 스스로 작동하도록 설계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AI와 이미지 생성이 핵심적 역할을 차지하는 이 신작에서 ‘주체성의 이양’은 더 이상 중립적인 조건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AI는 추상적 불확정성을 자율적으로 생성하지 않는다. 어떤 신체를 입력하고, 어떤 이미지를 선택하며,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폐기할 것인지는 여전히 인간의 결정에 달려 있다. 결국 질문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Liminals》가 만들어내는 이 상태는 과연 무엇을 생성하고 있는가. 그러한 생성물은 어떤 의미를 창출하는가.
피에르 위그는 오랫동안 저작자의 주체성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와 ‘안리(Annlee)’ 프로젝트를 통해 기존 저작권과 소유 관념에 도전하는 작업을 전개했고, 인물들에게 마스크를 씌워 익명화하거나 생태계·시간·비인간 존재가 주요 행위자가 되도록 작업을 구성해왔다. 그는 완결된 ‘작품’이 아니라 스스로 반응하고 변형되는 ‘창조물(creature)’을 만든다고 말해왔다. 이러한 전략은 미술의 시간 개념을 확장하고, 전시를 생태계를 연상시키는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는 일정한 설득력을 지녀왔다.
Pierre Huyghe, Liminals, 2025. Film still. Commissioned by LAS Art Foundation and Hartwig Art Foundation. Courtesy the artist. © Pierre Huyghe / VG Bild-Kunst, Bonn, 2026.
Pierre Huyghe, Liminals, 2025. Film still. Commissioned by LAS Art Foundation and Hartwig Art Foundation. Courtesy the artist. © Pierre Huyghe / VG Bild-Kunst, Bonn, 2026.
그렇지만 최근 작업에서 이 전략은 AI와 이미지 생성이라는 국면으로 이동하며 다른 문제를 드러낸다. 이번 영상에 등장하는 존재는 ‘인간 같은 형상’으로 설명되지만,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출산 흔적이 암시된 여성 신체이며 얼굴은 제거된 채 반복적으로 훼손되고 노출된다. 피에르 위그는 이를 젠더리스한 대체물로 설명하나, 결과물은 지나치게 익숙한 남성적 상상력의 재현으로 읽힐 여지를 남긴다. 불확정성을 실험한다는 명분 아래, AI가 양산하는 부산물에서 흔히 발견되는 폭력성과 혐오감, 여성 대상화가 다시 호출된다.
이로 인해 《Liminals》를 둘러싼 베를린 미술계의 반응은 단순한 호불호를 넘어선다. 디지털아트 비평가 아니카 마이어(Anika Meier)는 이 작업을 두고 ‘AI 쓰레기(slop)’라는 표현하며 기술적 외피와 거대 제작 규모에 비해 이미지가 지나치게 진부하고 폭력적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얼굴 없는 여성 신체가 반복적으로 훼손되는 장면을 두고, 이는 불확정성의 실험이라기보다 오래된 상상력의 재현에 가깝다고 비판했다.
Pierre Huyghe, Liminals, 2026. Installation view at Halle am Berghain, Berlin. Commissioned by LAS Art Foundation and co-commissioned by Hartwig Art Foundation. Courtesy the artist. © 2026 Pierre Huyghe. Photo: Andrea Rossetti © VG Bild-Kunst, Bonn, 2026.
Pierre Huyghe, Liminals, 2026. Installation view at Halle am Berghain, Berlin. Commissioned by LAS Art Foundation and co-commissioned by Hartwig Art Foundation. Courtesy the artist. © 2026 Pierre Huyghe. Photo: Andrea Rossetti © VG Bild-Kunst, Bonn, 2026.
한편 독일의 유력 일간지 ‘디 차이트(Die Zeit)’에 기고한 평론가 토비아스 팀(Tobias Timm)은 또 다른 각도에서 이 전시를 문제 삼는다. 그는 이 전시를 ‘고급 키치(Edelkitsch)’와 ‘번잡한 허세(Brimborium)’로 규정하며 막대한 물리적·기술적 자원을 동원하고도 사유가 부재한 “머리가 비어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위그의 형식 실험이 더 이상 사유를 생성하지 못하는 공허에 그치고 있다고 서술한다.
이같은 비평들은 방향은 다르지만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Liminals》는 분명 하나의 상태를 만들어내지만, 그 상태가 무엇을 생성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충분히 설득하지 못한다. 작가가 제시한 불확정적 가상 상태는 원대하지만, 그 의미는 현실 안에서 모호하게 남는다. 저작자의 주체성을 이양한다는 명분 아래, 결과물에 대한 책임 역시 흐릿해진다.
현대미술이 여전히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해를 지연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왜 이것이 미술인가”라는 질문을 남겨두기 때문이다. 사변적 가상 역시 현실을 대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다시 사유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할 때 미학적 의미를 획득한다. 《Liminals》는 피에르 위그가 실험해온 전시 제도 형식의 가능성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그 실험이 어떤 조건에서 공허해지며 더 이상 질문으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베를린=변현주 큐레이터
《Liminals》는 바로 여기에서 논쟁을 촉발한다. 위그는 이번 전시에서도 저작자의 주체성을 후퇴시키고, 시스템과 환경, 비인간적 조건이 스스로 작동하도록 설계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AI와 이미지 생성이 핵심적 역할을 차지하는 이 신작에서 ‘주체성의 이양’은 더 이상 중립적인 조건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AI는 추상적 불확정성을 자율적으로 생성하지 않는다. 어떤 신체를 입력하고, 어떤 이미지를 선택하며,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폐기할 것인지는 여전히 인간의 결정에 달려 있다. 결국 질문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Liminals》가 만들어내는 이 상태는 과연 무엇을 생성하고 있는가. 그러한 생성물은 어떤 의미를 창출하는가.
피에르 위그는 오랫동안 저작자의 주체성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와 ‘안리(Annlee)’ 프로젝트를 통해 기존 저작권과 소유 관념에 도전하는 작업을 전개했고, 인물들에게 마스크를 씌워 익명화하거나 생태계·시간·비인간 존재가 주요 행위자가 되도록 작업을 구성해왔다. 그는 완결된 ‘작품’이 아니라 스스로 반응하고 변형되는 ‘창조물(creature)’을 만든다고 말해왔다. 이러한 전략은 미술의 시간 개념을 확장하고, 전시를 생태계를 연상시키는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는 일정한 설득력을 지녀왔다.
이로 인해 《Liminals》를 둘러싼 베를린 미술계의 반응은 단순한 호불호를 넘어선다. 디지털아트 비평가 아니카 마이어(Anika Meier)는 이 작업을 두고 ‘AI 쓰레기(slop)’라는 표현하며 기술적 외피와 거대 제작 규모에 비해 이미지가 지나치게 진부하고 폭력적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얼굴 없는 여성 신체가 반복적으로 훼손되는 장면을 두고, 이는 불확정성의 실험이라기보다 오래된 상상력의 재현에 가깝다고 비판했다.
이같은 비평들은 방향은 다르지만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Liminals》는 분명 하나의 상태를 만들어내지만, 그 상태가 무엇을 생성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충분히 설득하지 못한다. 작가가 제시한 불확정적 가상 상태는 원대하지만, 그 의미는 현실 안에서 모호하게 남는다. 저작자의 주체성을 이양한다는 명분 아래, 결과물에 대한 책임 역시 흐릿해진다.
현대미술이 여전히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해를 지연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왜 이것이 미술인가”라는 질문을 남겨두기 때문이다. 사변적 가상 역시 현실을 대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다시 사유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할 때 미학적 의미를 획득한다. 《Liminals》는 피에르 위그가 실험해온 전시 제도 형식의 가능성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그 실험이 어떤 조건에서 공허해지며 더 이상 질문으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베를린=변현주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