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연말에 11박 12일 동안 호주 멜버른-뉴질랜드 남섬 여행을 다녀왔다. 감히 '인생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좋았다. 이 여행 덕분에 나는 10년 만에 동생과 다시 가까워졌다는 느낌을 받았고, 조카와는 처음으로 가족이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캠핑카를 타고 여행한 뉴질랜드 남섬이 좋았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맛있는 음식에 뉴질랜드 와인을 열심히 마셨다. 칼럼니스트 이모가 준비해간 책이 조카의 취향 맞춤이라서 매일 저녁 캠핑카의 벙커 베드에 누워서 함께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 나를 위해서 준비해 간 책은 별로였다. 뉴질랜드 작가를 몰라서 열심히 검색해서 찾은, 유명하다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출신 작가의 스릴러 소설이었다. 원래도 스릴러 소설은 좋아하지 않는데, 이번에도 '살인과 강간이 아니면 스릴러라는 장르는 전개가 안 되는 걸까'라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한번 더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번 여행이 끝나고 이 소설로 칼럼을 쓰려고 했는데 계획에 갑자기 적신호가 켜졌다. 그러다가 문득, ‘살면서 원래 계획대로 되는 것은 많이 없지, 특히 죽음에 관해서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 신보경
사진. © 신보경
'신경외과 의사인 내가
서른여섯에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미국의 서른 여섯살 신경외과 의사 폴 칼라니티가 지은 <숨결이 바람 될 때>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지만, 의학대학원을 거쳐서 의사가 된 그가 폐암을 발견하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의 이야기를 적은 에세이이다. 발견했을 때는 이미 4기, 그에게 남은 시간은 길지 않았다. 매일 수술을 하고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미국 신경외과 학회에서 수여하는 최우수 연구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젊은 의사였다.

‘재앙(disaster)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부서지는 별을 의미하는데, 신경외과의의 진단을 들었을 때 환자의 눈빛이 바로 그렇다’라고 얘기한 의사는 자기 자신이 환자가 되어서 병증을 직접 확인했다. 아마도 눈앞에서 부서지는 별이 보였을 것이다.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책 표지. / 이미지 출처. 알라딘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책 표지. / 이미지 출처. 알라딘
그래서 그가 선택한 일은

“내가 가진 지식은 그대로였지만 인생 계획을 짜는 능력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됐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만 하면 앞으로 할 일은 명백해진다. 만약 석 달이 남았다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다. 1년이라면 책을 쓸 것이다. 10년이라면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삶으로 복귀할 것이다. 우리는 한 번에 하루씩 살 수 있을 뿐이라는 진리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하루를 가지고 난 대체 뭘 해야 할까?”

그는 신경외과 의사로 일하면서 책을 쓰기 시작했다. 무엇이 삶을 의미 있게 하는가, 죽음을 마주한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인생을 마무리해야 하는가, 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냈다. 2013년 5월에 폐암을 발견한 그는 결국 2015년 3월에 생을 마감했다. 병세가 악화되는 중에서 신경외과 의사로서 수술방에 복귀하기도 했고, 2014년에는 아내 루시와의 사이에서 딸아이도 낳았다. 루시는 책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죽은 폴을 위해서 에필로그를 썼다.

“폴의 결단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증명할 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 자체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폴은 평생 죽음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죽음을 진실하게 마주할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결국 그는 그 일을 해냈다.”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외국 생활을 10년 넘게 하고 또 점점 나이가 들다 보니 과거에 친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더 이상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 멀어짐과 외로움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낯설게 다가왔다. 생각에 빠지거나 각종 소셜미디어 콘텐츠를 보면서 시간을 죽이는 상황들이 늘어났다.

뉴질랜드 여행은 나에게 다시 ‘지금, 당장 이 순간을 살아가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주는 시간들이었다. 캠핑카로 한 여행이라서 내 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발이 묶이고 밥을 먹지 못했다. 그런 시간들은 자연스레 폴 칼라니티의 책을 떠올리게 했다. ‘설사 내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그의 메시지가 말이다.

그리고 그의 생각을,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긴 그의 실천력을 나의 2026년에도 적용시키자고 다짐한다. ‘도덕적인 명상은 도덕적인 행동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는 그의 문장을 새기면서, 오늘도 살아남은 우리는, 그가 아쉽게 생각했던 하루하루를 또 잘 살아내야 할 것이다.
뉴질랜드 남섬의 마운트 쿡. / 사진. © 신보경
뉴질랜드 남섬의 마운트 쿡. / 사진. © 신보경
신보경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