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만든 와인 지형도 – 도멘과 샤또

프랑스 와인을 접하게 되면 와인 라벨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표시가 바로 도멘(Domaine) 또는 샤또(Château)이다.

하지만 와인 애호가가 아닌 이상 그 의미나 유래를 알기는 어렵고, 와이너리가 웅장하고 저택이나 성(castle)의 모습을 띠고 있어서 단지 멋있는 상표나 상호로서 샤또라는 이름을 붙였다거나(Château는 저택 또는 성을 뜻하는 castle에서 유래된 표현이다), 단순히 지역명을 따서 도멘(Domain은 '땅'을 의미한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도멘은 프랑스의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에서 주로 사용되는 개념으로서 직접 경작 및 양조를 하는 중소 규모 생산자를 일컫는 반면에, 샤또는 보르도(Bordeaux) 지방에서 한 명의 소유자가 넓은 포도밭을 소유·관리하면서 양조하는 방식을 뜻한다.
프랑스 와인 라벨에 적힌 도멘(Domaine)과 샤또(Château). / 사진 출처. 각각 spades wines&spirits와 german bottle shop erbil, hawler 홈페이지 캡처
프랑스 와인 라벨에 적힌 도멘(Domaine)과 샤또(Château). / 사진 출처. 각각 spades wines&spirits와 german bottle shop erbil, hawler 홈페이지 캡처
사실 도멘과 샤또라는 명칭은 개념, 와이너리의 규모, 역사적 배경, 라벨 뉘앙스에서 큰 차이가 있지만 더욱 흥미로운 점은 바로 그 차이가 다름 아닌 프랑스 상속법과 나폴레옹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상속이라는 제도가 어떻게 부르고뉴 와인 라벨에서 마주하는 복잡다단한 도멘들의 이름과 보르도의 거대하고 웅장한 샤또가 보여주는 구조적 차이를 만들어 냈을까?

나폴레옹 법전과 봉건주의 타파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전, 프랑스 포도원의 소유 구조는 교회와 귀족 중심으로 고착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포도원은 거대한 단일 경작지였으며, 하나의 밭이나 포도원을 분할하여 소유하는 구조는 없었다. 그리고 여러 귀족은 대규모 포도원을 소유하면서 이를 주요한 자산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교회와 귀족 중심의 봉건적 질서는 철폐되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유명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04년 나폴레옹 법전을 공포하여 봉건 질서의 완전한 철폐를 목표로 했으며, 그중 새로운 민법을 통해 장자 상속제를 폐지하였다.

나폴레옹 법전 이전에는 프랑스에서 장남이 가문의 재산과 지위를 이어받는 관습이 강했고, 이러한 문화가 귀족들의 세습을 더욱 공고하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폴레옹 법전은 부모 사망 시 재산을 장남이 독차지하지 못하도록 하고 모든 자녀에게 균등 분배하도록 규정하였고, 이러한 균등 상속의 원칙은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상속법과 포도밭의 분할

나폴레옹 시대에 시작된 균등 상속 원칙은 프랑스 와인 산지의 지도를 바꾸어 놓았다. 특히 부르고뉴 지역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원래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교회와 귀족의 소유였던 부르고뉴의 포도원은 혁명 후 몰수되어 개인들에게 팔려나갔고, 이후 나폴레옹 법전을 계기로 세대가 바뀔 때마다 포도밭이 상속으로 계속 분할되었다.

언뜻 보면 지극히 공평하고 합리적이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나누기 어려운 재산인 포도원에서는 새로운 문제의 씨앗이 되었고, 이 상속법이 모자이크처럼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부르고뉴의 소유 형태와 마치 회사와 같은 보르도의 대규모 샤또 체제를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부르고뉴 – 모자이크가 된 대지

부르고뉴 지방은 나폴레옹 법전에 따라 세대를 거듭할수록 상속으로 계속 분할되어 가면서 거의 ‘무한 분할’되었다. 일반적인 농지가 너무 작게 분할되면 최소한의 소출도 확보하기 어려워 생산성이나 경제성이 떨어지게 마련이지만, 와인은 다르다. 아주 작은 땅, 심지어 몇 줄의 포도나무에서도 세계 최고의 와인이 생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포도밭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잘게 쪼개지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나폴레옹의 상속법 덕분에 부르고뉴에서는 이렇게 작지만 개성 넘치는 가족경영 와이너리가 숱하게 탄생하는 효과를 낳았다. 포도밭이 잘게 쪼개진 덕분에 오히려 각 집안의 전통과 철학이 담긴 다양한 와인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부르고뉴에는 한 포도밭 이름 아래 여러 생산자가 각기 와인을 만드는 독특한 문화가 생겨나게 되었다. 즉, 겨우 돌담으로만 경계를 나누고 있는 같은 포도밭에서 나온 포도로 양조한 와인이라 해도, 와인 메이커의 성향과 양조 방식에 따라 개성이 다른 와인이 탄생할 수 있는 다양성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르고뉴 와인을 논할 때에는 어느 포도밭의 와인인지도 중요하지만 ‘누가(Domaine)’ 만들었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부르고뉴는 오늘날에도 프랑스의 다른 거대 와인 산지와 달리, 땅을 직접 일구는 농부 출신의 소규모 생산자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된다.

예를 들어 부르고뉴 코트 드 뉘(Côte de Nuits)의 상징인 클로 드 부조(Clos de Vougeot)라는 포도밭은 파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례다. 프랑스 혁명 전 하나의 수도원이 소유했던 이 50헥타르(약 15만평 정도로서 축구장 70개 정도의 면적이다)의 포도밭은 1889년 쥘 우브라르(Jules Ouvrard) 가문이 매각할 때 15명의 소유주에게 분할되었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소유주가 80명을 넘어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화이트 와인 산지인 몽라셰(Montrachet) 역시 마찬가지다. 불과 8헥타르 남짓한 이 작은 밭은 10여 개 이상의 가문과 도멘에 의해 철저하게 분할되어 있는데, 가장 작은 도멘 르플레브(Domaine Leflaive)는 이 중 0.08 헥타르(테니스 코트 3개 정도에 불과하다) 규모만을 소유하고 있다. 이 작은 밭에서 연간 1배럴(약 300병) 정도만의 와인을 생산하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가장 구하기 힘든 와인 중의 하나로도 손꼽힌다.
도멘 르플레브의 몽라셰. / 사진 출처. leon&son wine and spirits 홈페이지 캡처
도멘 르플레브의 몽라셰. / 사진 출처. leon&son wine and spirits 홈페이지 캡처
이와 달리 보르도의 경우 전통적인 거대한 샤또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법적 우회로를 택했다. 바로 지분 소유 방식이다. 즉, 보르도의 대형 샤또들은 19세기부터 민사 회사(Société Civile)나 주식회사 형태를 도입하여, 상속 시 자녀들에게 땅 대신 회사의 '주식'을 나누어 주었다. 이를 통해 비록 샤또의 물리적 통합성은 유지할 수 있었으나, 다수의 주주가 대형 샤또를 소유하다 보니 주주 간의 갈등이라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실제로 보르도 생테밀리옹의 명문 와이너리 샤또 앙젤뤼스(Chateau Angélus)에서는 창업자 집안의 자손들이 지분을 나눠 가진 가운데 경영 방침을 두고 분쟁이 수년간 이어져 왔다. 앙젤뤼스는 오랫동안 생테밀리옹 최고 등급(그랑 크뤼 클라세 A)에 이름을 올린 저명한 샤또였지만, 가족 소유 지분이 몇 갈래로 갈라지면서 내부 합의가 어려워졌고, 최근 법원의 결정으로 전문 경영인이 한시적으로 경영에 관여하게 되기도 하였다.

상속에 얽힌 사건들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2018) 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모이게 된 3남매가 아버지의 와이너리를 공동 경영하면서 다시 의기투합하게 되고 그간 잊고 지낸 형제의 사랑도 다시 발견하게 된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사실 영화에서 3남매를 더욱 끈끈하게(?) 이어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악명 높은 프랑스의 상속세이다. 프랑스의 상속세는 최대 45%에 달하는데, 영화에서 3남매는 5억원이 넘는 상속세를 어떻게 부담할 것인지, 아버지의 와이너리를 처분할 것인지 지킬 것인지의 기로에 서게 된다. 결국 다른 재산까지 처분해가며 상속세를 납부해 아버지의 와이너리를 지키는 해피엔딩으로 영화는 막을 내리지만, 사실 프랑스 와인 가문들 사이에서는 상속세로 인해 와이너리 운영을 포기하고 거대 자본에 이를 매각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스틸 컷. / 사진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스틸 컷. / 사진 출처. 네이버영화
예를 들어 최근 부르고뉴의 알록스-코르통(Aloxe-Corton)의 도멘 푸아조(Domaine Poisot)는 소유 포도밭 1.3헥타르를 LVMH에 매각하였다. 참고로 LVMH는 Louis Vuitton Moët Hennessy의 약자이며, 루이비통, 디올, 펜디, 티파니, 태그호이어 등 럭셔리 브랜드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돔페리뇽, 모엣 샹동, 샤또 뒤캠과 같은 주류 브랜드도 보유하고 있는, 세계 최대의 명품 브랜드 제조·판매·유통 기업 집단이다. 와인 메이커인 레미 푸아조는 인터뷰에서 "우리는 여전히 밭을 갈고 와인을 만들 것이다. 하지만 땅의 주인은 이제 LVMH다. 상속세가 너무 비싸다. 우리는 백만장자가 아니기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라며 한탄했다. 지가 상승으로 인해 자산 가치가 올라 상속세는 하늘을 찌르지만, 와인 판매 수익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자산 부자, 현금 빈곤' 현상이 부르고뉴 농부들을 소작농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나폴레옹의 유산

나폴레옹은 "나의 진정한 영광은 40번의 전투 승리가 아니라, 영원히 기억될 나의 민법전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민법전은 영원히 남았지만, 그것이 와인 세계에 남긴 유산은 복합적이다.

그의 민법전이 부르고뉴의 섬세하고 개성 있는 도멘(Domaine) 중심의 와인 생산 방식을 만들 것을, 보르도의 와이너리들이 기업화된 모습으로 버틸 것을, 그리고 동시에 와인 가문의 영속성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상속세라는 칼날이 될 것을 예견하였을까?

다음에 부르고뉴의 도멘 또는 보르도의 샤또 와인을 마실 때, 그 액체 너머에 서려 있는 나폴레옹의 유산과 그 이후 200년 동안 이어진 프랑스 와인 가문의 흥망성쇠를 생각해 보자.

테루아는 땅이 기억하는 역사이지만, 그 땅의 주인은 법이 결정한다.

한상훈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