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갈래 길이 난 숲에서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고,
그리고 그 선택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 로버트 프로스트

교실 : 전통적 가치관의 공간

영화의 배경이 되는 웰튼 고등학교는 엄격한 규율과 통제로 유지되는 학교다. 이곳의 교실은 반복되는 창문과 일률적인 천장 조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안에서 같은 옷을 입은 학생들은 똑같은 책상에 앉아 같은 목표를 바라보도록 강제된다. 그들의 앞에는 아이비리그에 진학시키려는 선생님과 위인들의 사진이 있다. 이 교실에서의 학생은 사고의 주체라기보다는 관리되는 대상에 머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웰튼 고등학교의 졸업생인 키팅 선생님이 새로 부임하면서 이 질서에 균열이 생긴다. 그는 교단에 서서 학생을 내려다보는 방식으로 수업하지 않는다. 자세를 낮춰 아이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말을 건다. 학생 자신의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책을 찢게 한다. 책상 위에 올라서서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라 권한다. 키팅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처럼 곧바로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스스로 깨닫게 만든다.
교실에서 배울 수 없는 것, 동굴에서 배울 수 있는 것 '죽은 시인의 사회'
교실에서 배울 수 없는 것, 동굴에서 배울 수 있는 것 '죽은 시인의 사회'
전통적인 교실의 모습과 그 체제를 전복시키는 키팅 선생님 / 사진제공. 넷플릭스
전통적인 교실의 모습과 그 체제를 전복시키는 키팅 선생님 / 사진제공. 넷플릭스
동굴 : 내면의 소리를 발견하는 공간

학생들은 키팅 선생님이 학창 시절에 참여했던 시 낭송 모임, 'Dead Poets Society'의 존재를 알게 된다. 몇몇 학생들이 학교의 규칙과 평가에서 벗어나 동굴로 숨어들어 시를 읽던 모임이다.

학교가 정한 규칙이 없는, 정식 수업도 아닌 활동이었다. 특히 닐은 이 활동에 큰 매력을 느낀 학생이었고, 친구들과 함께 이 시 낭송 모임을 부활시킨다.

동굴은 교실과는 너무나도 다른 공간이었다. 학교의 설계도에도 없고, 시간표에도 기록되지 않는 장소다. 교실과 달리 거칠고 비정형적인 동굴의 암벽은 질서를 거부하고, 어스름한 달빛은 내면으로 침잠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선생님도, 평가도, 성적도 없다. 덕분에 내면의 표현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고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장 폴 사르트르

예를 들어 의자는 앉기 위해 존재한다. 앉는다는 목적이 먼저 정해지고, 그 목적에 맞도록 의자의 형태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태어날 때 어떤 목적도 부여받지 않는다. 살아가며 선택하고, 실패하고, 수정하며 스스로의 본질을 찾아나가는 존재다.

닐은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선택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한 분명한 감각을 남겼다.
교실에서 배울 수 없는 것, 동굴에서 배울 수 있는 것 '죽은 시인의 사회'
교실을 떠나 자신들만의 동굴로 향하는 학생들 / 사진제공. 넷플릭스
교실을 떠나 자신들만의 동굴로 향하는 학생들 / 사진제공. 넷플릭스
무대와 서재 : 자아실현의 공간과 좌절의 공간

새는 알에서 나오려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 헤르만헤세

닐은 직접 극장을 찾아가 오디션을 보고 배역을 따낸다. 그 연극 무대는 닐이 스스로 날아가 닿은 곳이다. 무대 위의 닐은 타인의 요구에 의해 존재하지 않고, 스스로의 날갯짓으로 존재한다.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닐은 자신이 선택한 새로운 세계에 존재한다.

닐의 아버지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닐을 자신의 서재로 데려와 소리친다. 연극 따위는 당장 그만두라고. 연극은 아버지에게 결코 허락될 수 없는 일이었다. 닐에게는 이미 아버지가 정해둔 진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버드 의대 진학. 아버지가 보기에 안전하고 성공이 보장된 길이었다.

하지만 이 길은 선의로 포장된 아버지의 욕망으로 가득할 뿐이었다. 닐은 스스로 나아가는 주체가 되지 못한, 부여받은 미래에 배치된 존재였다. 그는 결국 연극이라는 자신의 선택을 거두고 만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권총으로 죽음을 선택한다.

이 장면은 일리야 레핀의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을 연상케 한다. 분노 끝에 아들을 죽인 차르(군주)는 피로 물든 몸을 끌어안은 채 망연자실해 있다. 폭군이었던 그는 아들의 행동을 자신에 대한 반역으로 받아들였다. 그 분노는 폭력으로 이어졌고 그 끝에 아들이 사망하고 만 것이다. 두 아버지 모두 극단에 치달은 후에야 절망한다.
무대에서의 닐과 죽음을 선택한 닐 / 사진제공. 넷플릭스
무대에서의 닐과 죽음을 선택한 닐 / 사진제공. 넷플릭스
일리야 레핀 <이반 4세와 그의 아들 이반, 1581년 11월 16일>, 1885년. 모스크바 트레챠코프 미술관 소장.
일리야 레핀 <이반 4세와 그의 아들 이반, 1581년 11월 16일>, 1885년. 모스크바 트레챠코프 미술관 소장.
남겨진 질문

영화는 다시 교실로 돌아온다. 책상도 창문 너머의 풍경도 변하지 않았다. 키팅 선생님은 닐의 죽음을 야기했다는 이유로 쫓겨났고, 학교는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질서대로 작동한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지 않을 뿐, 학생들의 마음에는 키팅 선생님의 울림이 남아있다.

"벽돌아 너는 무엇이 되고 싶니?"
"저는 아치(Arch)가 되고 싶어요"
"아치는 비싸니까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벽돌을 올리면(Lintel) 어떻겠니?"
"저는... 아치(Arch)가 되고 싶어요"
– 루이스 칸

위대한 건축가 루이스 칸은 건축 재료인 벽돌과 대화를 나눈다. 좋은 건축가라면 재료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본질에 적합한 형태를 적용하라는 뜻이다. 벽돌의 본질을 무시한 채 겉모습만 꾸미는 것은 재료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다. 이 말은 건축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도 우리의 길을 찾아 그 길을 스스로 걸어가야 한다.

나는 숲으로 갔네
나 스스로 살고 싶어서
삶의 정수를 받아들이고
삶 깊숙이 살기 위해
삶이 아닌 그 모든 것을 물리치기 위해
내 끝을 맞이할 때가 되어서야
내 삶이 아니었음을 깨닫지 않기 위해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좌] 상인방 위의 벽돌, [우] 아치 형태의 벽돌(루이스 칸이 설계한 'Arts United Center') / 사진. ©Jason R. Woods
[좌] 상인방 위의 벽돌, [우] 아치 형태의 벽돌(루이스 칸이 설계한 'Arts United Center') / 사진. ©Jason R. Woods
최영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