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수명이 다해 가는 듯 위기감이 몰려들고, 당장 2~3년을 내다보기 힘들 만큼 기술 발전에는 가속도가 붙으니, 마치 유례없는 생존 게임에 직면한 것만 같다. 초불확성의 시대에서 지난 9월 런던에서 열린 세계 디자인 총회 2025는 그렇게 디자인계의 국제 교류를 넘어, 지구상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거대한 창의적 파동을 불러일으켰다.

56년 만에 영국에서 막을 올린 제34회 세계 디자인 총회(World Design Congress)는 디자인이 인류의 존립을 위협하는 위기를 타개할 생존 전략임을 선언하는 자리였다. 이러한 전 지구적 담론을 주도하는 세계 디자인 기구는 1957년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인간 중심의 디자인을 주창하며 파리에서 첫발을 뗐다. 출범 이후 당대 디자인계의 화두를 관통하는 학술 콘퍼런스를 이끄는 것은 물론, 디자인 정책의 방향성을 제안하는 글로벌 거버넌스로서의 역할, 그리고 디자인을 통한 도시 혁신의 모범 사례인 세계 디자인 수도 발표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을 공고히 해왔다.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한 행사는 영국 디자인 위원회(Design Council)와 함께 런던의 도시 정체성을 상징하는 브루탈리즘 건축의 정수, 바비칸 센터(Barbican Centre)에서 9월 9일과 10일 양일간 진행됐다.
(왼쪽부터) 예술가 브라이언 이노, 기후 활동가 토리 츠이, 비평가 맥스 프레이저가 대담을 나누고 있다. / 사진. ⓒWayne Lo - Design Council
(왼쪽부터) 예술가 브라이언 이노, 기후 활동가 토리 츠이, 비평가 맥스 프레이저가 대담을 나누고 있다. / 사진. ⓒWayne Lo - Design Council
총회는 ‘지구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Planet)’을 사명으로 선포하고, 디자인이 기후 위기 대응의 구심점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며 다음의 다섯 가지 실천적 지표를 공개했다.
▶ 국경과 분야를 초월한 협업으로 시대적 과제를 해결
▶ 낭비를 설계상의 결함으로 규정하여 자원 순환형 산업 생태계를 재편
▶ 넷 제로(Net Zero) 달성을 위한 제도적 정렬
▶ 생태 회복적 공간 조성을 강조
▶ 이 모든 변화의 핵심 동력으로 공동의 결속을 재확인

현장에는 건축가 노먼 포스터 경, 디자이너 토마스 헤더윅, 경제학자 마리아나 마주카토, 예술가 브라이언 이노, 패션 디자이너 프리야 알루왈리아 등 20개국 135명의 연사를 비롯해 글로벌 비즈니스·교육·정책 리더 1,200여 명이 집결해 가시적인 대안을 논의했다. 무엇보다 큰 주목을 받은 25인의 2025 세계 디자인 총회 개척자들(25 for 2025 World Design Congress Trailblazers)은 지속 가능한 디자인의 미래를 견인할 주역들이었다.
디자인 위원회 최고 경영자인 미니 몰, 수하르 칸, 나차이 오드리 치에자 등 글로벌 디자인 리더가 한 자리에 모였다. / 사진. ⓒMatt Crossick - PA Media Assignments
디자인 위원회 최고 경영자인 미니 몰, 수하르 칸, 나차이 오드리 치에자 등 글로벌 디자인 리더가 한 자리에 모였다. / 사진. ⓒMatt Crossick - PA Media Assignments
산업 디자이너 톰 딕슨, 크리에이티브 기술 권위자 수하르 칸, 무대 디자이너 에스 데블린을 포함해 영국 디자인계를 대표하는 5인의 앰배서더가 엄선한 20명의 개척자는 패션과 AI, 생체 재료와 건축을 넘나들며 창의성과 환경적 책임이 결합한, 지속 가능한 상생의 토대를 만드는 생생한 지표를 입증했다. 이들은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하는 방법론을 고수하며, 신기술과 차세대 소재를 활용해 디자인의 문턱을 낮추고 교육 및 창작 체계 재편의 선두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 총회에서 만난 4인의 선구자와의 인터뷰는 디자인이 통합적 매개체로서 인류와 생태계의 공존을 위한 거대 시스템의 대전환을 주도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현장 목소리: 디자인 리더 4인이 정의하는 ‘디자인 포 플래닛’이란?

● 나차이 오드리 치에자 l 페이버 퓨처스 설립자

나차이 오드리 치에자(Natsai Audrey Chieza)는 디자인과 생명공학의 접점에서 신 산업 패러다임을 정립한다. 건축학과 미래 소재를 전공한 뒤, 화석 연료 기반의 소모적인 자원 약탈 구조를 탈피하기 위해 2018년 바이오 디자인 전문 스튜디오 페이버 퓨처스(Faber Futures)를 설립했다. 이곳은 단순한 소재 연구소에서 나아가 과학자와 디자이너가 초기 실험 단계부터 공조해 공동체의 안녕과 자연의 선순환 체계로 전환하는 플랫폼이다.
나차이 오드리 치에자 / 출처. Design Council 사이트
나차이 오드리 치에자 / 출처. Design Council 사이트
“제가 정의하는 '지구를 위한 디자인'은 인간뿐만 아니라 그간 배제해 왔던 모든 생명체를 설계의 이해관계자로 포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수의 자본가가 아닌 모두가 빠짐없이 혜택을 누리고, 생태계를 훼손하는 대신 회복시키는 물질적 환경을 조성해야 하지요.”

이러한 철학은 그녀의 또 다른 브랜드인 노멀 피노미나 오브 라이프(Normal Phenomena of Life)의 론칭과 더불어 대중이 보다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디자인 언어로 번역된다. 미생물을 활용한 무독성 염색 기술처럼 혁신적인 성과를 대중이 일상에서 향유할 수 있는 제품으로 치환하여 소비자의 인식 변화를 이끄는 것. 특히 치에자는 한국의 발효 문화와 고도의 기술력이 결합할 때 발생할 시너지를 높게 평가하며, 디자인이 생명체와의 공생을 택할 때 비로소 재생적 가치 사슬이 형성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했다.

● 수하르 칸 l 오픈엔디드 설립자

구글 아트 앤 컬처의 창립 멤버로서 전 세계 문화유산의 디지털화를 이끌었던 수하르 칸(Suhair Khan)은 현재 학제적 AI 연구소이자 인큐베이터인 오픈엔디드(Open-ended)를 운영한다. 그녀는 인공지능이 자본주의적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경계하며, 전 지구적 돌봄을 담은 AI 2.0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저는 평생을 AI와 테크 분야에 몸담았어요. 그동안 인공지능이 인간의 인지 능력에만 몰두해 왔다면, 이제는 ‘자연의 지능’으로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버섯이나 고래의 소통 방식, 산호초가 생물 다양성을 유지하는 경이로운 메커니즘을 기술이 어떻게 지원할 수 있을지가 관건입니다.”
수하르 칸 / 출처. Design Council 사이트
수하르 칸 / 출처. Design Council 사이트
칸은 톰 딕슨과 협업한 ‘아쿠아 컬처: 수면 아래의 재생(Aqua Culture: Regeneration Below the Surface)’을 통해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프로젝트는 몰디브 해저에 통합된 물리적 산호 구조물에 AI 기반의 데이터 매핑 기술을 이식하여, 보이지 않는 해양 생태계의 변화를 시각화하고 대규모 산호초 복원 및 해안 침식 방지를 위한 지능형 환경 인프라를 설계한 것입니다. 결국 ‘지구를 위한 디자인’이란 디자인 커뮤니티를 초월해 기술과 자본을 움직이는 모든 주체가 공생의 윤리적 기준 안에서 그 역할을 재정립하는 것입니다.”

● 캣 드루 l 디자인 위원회 최고 디자인 책임자

의제인 ‘지구를 위한 디자인’을 총괄 기획한 디자인 위원회는 1944년 설립 이래 영국 창의 산업의 이정표를 제시해 온 권위 있는 기구다. 캣 드루(Cat Drew)는 이 행사가 디자인이 기후 위기의 해결사로 거듭나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고 단언했다.

“총회가 기후 위기와 생태계 회복을 이토록 단일한 아젠다를 내세운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디자인 위원회가 2021년 발표한 이 미션은 현시대 속 디자인의 실천적 역할에 대한 치열한 고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캣 드루 / 출처. Design Council 사이트
캣 드루 / 출처. Design Council 사이트
그녀는 “자체 연구 결과, 제품이 환경에 미치는 파급효과의 80%가 설계 단계에서 좌우됩니다. 즉, 디자이너의 판단이 곧 지구의 미래를 결정짓는 변수인 셈이죠”라고 설명하며, 영국 디자인 경제가 창출하는 연간 약 1,000억 파운드(약 180조 원, 1파운드당 1,800원 기준)의 부가가치와 197만 명의 디자인 인력이 가진 잠재력에 주목했다. 현업 디자이너의 77%가 자동차, 유통, 인프라 등 산업 전반의 심장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만큼, 이들이 지구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을 할 때 광범위한 녹색 전환(Green Transition)이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따라서 우리는 ‘2030년까지 100만 명의 디자이너 재교육’이라는 로드맵을 수립했습니다. 현재 디자이너의 71%가 지속 가능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지만, 실행 기술을 갖춘 이는 43%에 불과한 이 격차를 해소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 벤 셰퍼드 l 디자인 포 굿 의장

벤 셰퍼드(Ben Sheppard)는 디자인의 가치를 기업 경영의 실질적 성과와 인류 보편적 자산으로 구체화해 온 전략가다. 글로벌 컨설팅 그룹 맥킨지의 파트너를 역임했으며, 비영리 연합체 디자인 포 굿(Design for Good)의 공동 설립자 겸 의장이다. 그는 디자인 포 굿의 탄생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저는 수년간, 총매출 2조 달러(약 2,800조 원, 1달러당 1,400원 기준) 규모에 달하는 기업들의 디자인 책임자들을 한자리에 모을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들과 인공지능, 지속가능성, 윤리와 성장과 같은 주제를 주기적으로 논의해 왔으나, 거대 난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를 통감했지요.”
벤 셰퍼드 / 출처. Ben Sheppard의 Linked in
벤 셰퍼드 / 출처. Ben Sheppard의 Linked in
이에 셰퍼드는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를 강력한 결속력으로 삼아, 2030년까지 전 세계 1,000만 명 이상의 삶을 개선하겠다는 구체적인 로드맵과 함께 실행 중심의 글로벌 연합체를 구축했다. 아울러, 현재의 AI 산업을 2000년대 초반의 닷컴 버블에 비유하며, 사용자 경험과 디자인 리더십이 결여된 기술은 결국 도태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미래 디자인의 지향점은 사회적 형평성, 환경적 지속성, 경제적 타당성 간의 균형을 맞추는 생명 지향 디자인(Life-centered Design)으로의 진화다. “인간에게는 편리하지만 생태계에는 치명적인, 대량 소비 시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비닐봉지처럼 협소한 관점의 설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라고 지적하며, 초불확실성의 국면에서 진정한 공존의 개념을 상기시켰다.

런던에서 서울, 부산으로 이어질 디자인 임팩트

런던의 창의적 모멘텀은 향후 몇 년간 한국을 중심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세계 디자인 기구가 창립 70주년을 맞이하는 2027년, 제35회 세계 디자인 총회의 개최지로 서울이 확정되었으며, 2028년 세계 디자인 수도로 부산광역시가 선정되었다. 2026년 프랑크푸르트 라인마인으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을 부산은 2010년 서울에 이어 국내 두 번째로 이 영예로운 타이틀을 획득하게 되었다. 부산디자인진흥원이 표방한 ‘포용적 도시, 참여적 디자인(Inclusive City, Engaged Design)’이라는 비전은 시민의 회복탄력성과 협력의 정신을 바탕으로 도시의 미래를 재설계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런던 도심, 바비칸 센터 내 디자인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모습 / 사진. ⓒWayne Lo - Design Council
런던 도심, 바비칸 센터 내 디자인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모습 / 사진. ⓒWayne Lo - Design Council
유승주 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