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초등학생 때 <트리스탄과 이졸데>라는 제목의 만화책을 선물 받았다. 트리스탄이라는 이름의 기사와 적국의 공주 이졸데의 운명적인 사랑도 절절했지만, 기사의 이야기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림체와 도입 부분의 장면이 떠오르는 걸 보면 트리스탄의 이야기에 무척이나 매료되었던 듯 하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트리스탄이 아서왕과 함께했던 원탁의 기사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멀린의 손에 자란 아서왕과 그의 왕비 기네비어 그리고 원탁의 기사들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서 전설과 신화에 더 많은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아서왕의 엑스칼리버뿐 아니라 이졸데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트리스탄, 왕비 기네비어와 사랑에 빠져버린 호수의 기사 란슬롯 등 아서왕 이야기는 다양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로 가득했다.
영화 <그린 나이트>는 그 원탁의 기사 중 아서왕의 조카인 가웨인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 출처. IMDb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 출처. IMDb
크리스마스이브에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 앞에 녹색 기사가 나타나 도발한다. 가장 용맹한 자가 자신의 목을 베면 명예와 재물을 주겠다는 것이다. 용감무쌍한 원탁의 기사들은 그 제안에 솔깃하긴 했지만 녹색 기사가 내건 조건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다. 1년 뒤, 녹색 예배당을 찾아와 녹색 기사에게 했던 것처럼 그의 도끼날을 받는다는 것이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혈기 왕성하고 두려움이 없으며 방만한 생활에 젖어있는 가웨인이 그 도전에 나서고 1년이 지나 5가지 관문을 통과하는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 사진. ⓒ 2021 - A24, 출처. IMDb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 사진. ⓒ 2021 - A24, 출처. IMDb
가웨인은 왜 그 도전을 받아들였을까? 명예와 재물이 탐나긴 했겠지만 1년 뒤 녹색 기사의 도끼날을 받는다는 것은 목숨을 건다는 뜻이고 그렇게 생을 저버리기엔 1년은 너무나 짧은 시간이 아닌가?

가웨인은 실제로 명예가 절실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기사들처럼 연회 때마다 떠들어댈 무용담도 없고 그런 그에게는 영웅을 기리는 노래가 주어지지 않았다. 아서왕의 조카라는 것 외에는 이렇다고 할 무언가가 없다. 고매한 인격도 영웅의 모습도 갖추지 못한 가웨인이기에 녹색 기사의 제안이 솔깃했을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제안임에도 불구하고.

아서왕 이야기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이야기 중 가웨인의 이 이야기는 새로웠고, 그가 녹색 기사의 목을 베고 1년 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그 1년은 과연 어떠했을까 싶었다.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 사진. ⓒEric Zachanowich, 출처. IMDb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 사진. ⓒEric Zachanowich, 출처. IMDb
# 2

디브에는 젊은 재봉사 비외른이 살고 있었다. 여성의 옷을 만드는 그는 솜씨 좋고 잘생긴 젊은이였고 젊은 여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의 이웃에는 수를 놓는 여자 콜브륀이 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죈느라 불리는 비외른을 너무도 사랑해서 애가 탄 나머지 죈느를 찾아가 청혼하고야 만다. 죈느가 콜브륀에게 말한다.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자신의 벨트를 건네면서 이것과 똑같이 아름다운 수를 놓아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벨트에 놓인 수는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어서 대단한 실력을 가진 콜브륀 조차 어찌할 수 없었다. 절망에 사로잡힌 콜브뢴은 누구든 자신을 도와달라고 기도한다. 죈느와 결혼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절절하고도 위험한 맹세를 담아.
출처. pixabay
출처. pixabay
그런 그녀에게 길을 잃은 영주가 찾아든다. 그녀에게서 따뜻한 자리와 간단한 음식을 제공받은 영주는 그녀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을 보고 이유를 묻는다. 사연을 들은 영주는 자신이 그 벨트와 흡사한 것을 가지고 있다며 보여준다. 두 벨트는 흡사한 정도가 아니라 똑같아 버렸다.
콜브륀은 또 다른 근심에 싸여 눈물을 흘린다. 이 벨트는 꼭 가지고 싶지만 그 값을 지불할만한 돈이 없기 때문이다. 영주는 벨트를 주겠다면서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1년 뒤 자신이 다시 찾아왔을 때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으면 되는데 만약 이름을 잊는다면 그녀를 데려가겠다고 것이다.

그의 이름은 아이드비크 드 엘.
콜브륀은 그 간단한 이름을 잊을 수는 없겠다고 생각하고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 벨트 덕분에 그녀는 죈느와 결혼해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렇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아홉 달이 흘렀을 때 콜브륀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영주와 약속한 1년이 다가오는데 그의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다.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하지만 도저히 기억 속에서 입술로 나오지 않는 이름. 절망한 콜브륀을 위해 죈느가 그 이름을 알아 오겠다고 하며 여정에 나선다.

파스칼 키냐르의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의 내용이다.
간단한 이름 따위 잊을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혀끝에서 맴돌며 도무지 발음되지 않는 이름. 기억 속 어딘가에 분명히 저장되어 있지만 모두지 명료하게 떠올릴 수 없는 이름.

우리 또한 가끔 이런 상황을 겪게 된다. 분명히 알고 있는 이름이지만 선뜻 떠오르지 않는, 발음이 될 듯 말 듯 초조하게 하는 이름이 있다. 결국 그 이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 우리는 절망한다. 비록 순간적이고 파장이 크지 않은 절망이라 할지라도 분명히 절망이 존재한다. 그러다가 그 이름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순간 우리는 또한 안도한다. 비록 순간적이고 파장이 크지 않은 안도라 할지라도 분명한 안도감을 느끼고 우리의 몸과 마음은 평정을 되찾는다.

우리의 입술을 간질이고 우리의 마음을 들썩이게 만드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언어. 파스칼 키냐르는 그렇게 되찾은 언어가 바로 ‘시’라고 말한다.

# 3

여자는 도무지 발화할 수 없다. 두꺼운 안경을 쓴 희랍어 강사가 그녀에게 읽어보라고 권하지만, 그녀의 입술은 조음하고 발성해서 의미 있는 소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녀의 재능은 언어에 있었다. 어린 시절 혼자 한글을 깨우치고 자음과 모음이 결합해 의미 있는 단어가 될 때 그 자음의 소리가 미세하게 달라진다는 것도 한글로 적을 수 없는 이중모음이 있다는 것도 스스로 알아낼 정도로 소리와 발음과 문자에, 뭉뚱그려 말하면 언어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소리를 언어로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말을 할 수 있었던 시절에도 그녀는 눈빛과 시선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오히려 눈으로 말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발화할 수 없게 된 여자는 점차 시력을 잃어가는, 두꺼운 안경을 쓴 희랍어 강사가 곤경에 빠졌을 때 그를 도와주게 되고 두 사람은 각자의 결핍을 끌어안은 채 서로를 바라보게 된다.
남자의 긴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여자는 문득 단어 하나를 떠올리는데 그 단어는 온전히 떠오르지 않고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뒤척이’고야 만다.
그렇게 뒤척인 언어는 훗날 여자의 입을 통해 튀어나왔을까 아니면 그대로 묻혀버렸을까 궁금해진다.

여자의 1년 뒤는, 남자의 1년 뒤는 또한 어떤 시간이 되었을까?
한강 작가의 <희랍어 시간>의 이야기이다.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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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언어는 인간의 고유하고 복잡한 소통방식이다. 생각해 보면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정교하고 섬세한 것인지 깜짝 놀라게 된다. 성대의 울림과 뱃속에서 끌어올리는 힘으로 소리를 만든다. 그렇게 나온 소리는 혀의 위치와 입술의 모양으로 조음 된다. 그렇게 조음 되고 힘을 받은 소리는 말이 되고 그 말은 많은 것을 전달하고 공유하게 한다.

하지만 그 말이 백 퍼센트 정확하게 발화되고 전달된다는 보장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어쩌면 언어가 쥐여주는 환상 속에서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언어로 옮기려 할 때 정확하고 명확하게 구현할 수 없음에 실망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 이미지를 언어로 옮기려 할 때 ‘혀끝에서 맴도는’ 경험 말이다.
지금 어떤 이미지를 그려낸 우리 각자의 언어는 1년 뒤 같은 언어로 발화될 수 있을까? 1년 후, 당신의 입술은 그 단어를 기억할 수 있을까?

신지혜 칼럼니스트•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