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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희 "형평성의 함정에 빠진 韓…연봉 200억 받는 엔지니어 키우자"
서울대 공대 출신 CEO에게 듣는다
다시 이공계 (5) 이석희 SK온 사장
연봉·호봉제로는 인재 유입에 한계
혁신제품 만들어도 보상은 승진 뿐
美처럼 직무급제 도입하는 게 시급
韓 창업환경, 정부가 나서서 바꿔야
中, 스타트업 잔인하게 경쟁시키고
철저하게 1등에 몰아주는 시스템
기업 커지면 부처서 투자 '바통터치'
美에 자녀있다면 무조건 공대 보낼 것
추론·수리 지능, 만 25세에 정점
'시간 축적' 필요한 인문학과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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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공계를 기피할까요.
“꿈과 비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세상에 없던 것을 이공계에서 만들 수 있다는 꿈을 꿀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혼신의 힘을 다했을 때 따라오는 경제적 보상이 필요해요.”
▷예전에는 안 그랬죠.
“1970~1980년대엔 1등이 물리학과를, 2등이 공대를 갔습니다. 우수한 인재가 곳곳에 포진해 있었고 성공한 선배를 보면서 나도 이렇게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죠.”
▷어떻게 하면 이런 인식을 바꿀 수 있습니까.
“롤모델이 필요합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30~40대에 연봉 200억원 이상을 버는 인재가 1000명만 나오면 됩니다. 중·고등학생이 꿈꾸는 풍요로운 삶을 이공계에서 이룰 수 있게 해주는 것이죠.”
▷꿈의 숫자 같네요.
“어렵지 않습니다. 정부와 기업이 나서서 1년에 100명씩 10년 동안 꾸준히 성공한 엔지니어를 배출하면 됩니다. 대학생이 쉽게 창업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고, 기업이 성과를 낸 인재에게 확실한 보상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합니다.”
▷창업 환경이 여전히 좋지 않습니다.
“맞아요. 과감히 도전할 수 있는 토양이 돼 있는지 돌아봐야 해요. 창업에 실패하면 신용불량자가 되고, 벤처캐피털(VC)은 여전히 2~3년 안에 엑시트(투자금 회수)할 수 있는 아이템에만 관심 있는 상황에선 창업하기가 어렵죠.”
▷중국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 대학 졸업생 중 창업하는 비율이 5%도 채 안 될 거예요. 중국은 대학 졸업생 중 15%가 창업 전선에 뛰어듭니다. 양국 대학 졸업생 숫자가 대략 1000만 명, 30만 명이니 단순 계산해봐도 양국 창업자는 각각 150만 명과 1만5000명으로 100배 차이가 날 거예요.”
▷중국 창업 시스템의 장점은 뭔가요.
“장점이라기보다 방식이 달라요. 중국은 정부가 주도해요. 스타트업 단계별로 될성부른 떡잎에 투자금을 집중 지원합니다. 기업 규모가 커지면 다른 부서가 또 지원해주는 식으로 바통 터치가 이뤄집니다. 그리고 창업에 실패하더라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미국 시스템을 잘 이식했어요.”
▷국가 주도가 대안인가요.
“꼭 그렇다고 할 수 없지만 중국만 놓고 보면 정부가 잔인할 정도로 경쟁시킵니다. 완전한 승자 독식 구조예요. 여기서 뒤처진 회사는 1~2위 기업에 흡수되는 게 일상입니다. 반대로 승자는 곧바로 정부 지원 아래 글로벌 챔피언이 될 수 있죠. 동기부여가 잘되고 있어요.”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국만의 투자 관행부터 깨야 합니다. 2~3년이 아니라 5~7년 이상을 내다보고 투자하는 등 돈에 대한 기대치를 바꿔야 합니다. 투자 비용 일부를 창업자에게 부담하는 일도 없애야 하고요.”
인터뷰에 동석한 황철성 서울대 석좌교수도 이 사장 의견에 공감했다. 황 교수는 “서울대 교수만큼 창업하기 좋은 위치에 있는 사람도 없지만 주변에 성공한 사례가 거의 없다”며 “교수마저 투자금을 조달하느라 개인 돈을 쓰고, 빚쟁이가 되는 구조에서 학생들의 창업을 독려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 현장에도 변화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엔지니어 선배로서 이공계 졸업생을 어떻게 배치하고, 이들의 꿈과 자부심을 키울지 고민했지만 뚜렷한 해법은 못 찾았습니다. 다만 과거의 ‘성장 방정식’이 먹히지 않고 있다는 건 확실해요.”
▷어떤 방식을 말하는 건가요.
“대기업이 공개 채용을 통해 대규모로 인력을 뽑고, 전공에 상관없이 필요한 자리에 배치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인력을 배분하기보다 직무에 맞게 사람을 뽑고, 직무별로 성과에 맞게 임금도 다르게 지급해야 합니다.”
▷직무급제가 필요하다는 말로 들립니다.
“맞습니다. 한 부서 또는 각 직무에서 필요한 인력을 상시 채용하고, 이들이 낸 성과에 따라 보상해야 합니다. SK하이닉스에서 HBM을 개발한 인력이 왜 다른 직원과 같이 왜 1억원만 받아야 하나요. 몇 배 더 인센티브를 줘도 됩니다.”
▷직원들의 반발이 있지 않을까요.
“한국이 한 단계 더 성장하려면 ‘형평성의 덫’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성과를 낸 만큼 보상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안정적이고 정돈된 삶을 살 수 있어야 이공계 후배가 꿈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어요.”
▷미·중은 어떤가요.
“미국 실리콘밸리에는 직무급제가 완전히 정착했습니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괜찮은 집을 엔비디아 직원이 모두 사가서 집값이 치솟고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니까요. 집 한 채에 수백만달러인데 회사가 잘되는 만큼 직원에게 충분한 보상이 이뤄지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조차 실리콘밸리보다 더 성과 중심으로 굴러갑니다. 수십억원의 연봉을 받는 연구원이 적지 않아요.”
▷이공계 출신 스타 최고경영자(CEO)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엔지니어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다만 한국이 원래부터 이랬던 것은 아닙니다. 30~40년 전엔 이공계 연구원이 대접받던 시절도 있었죠. 1990년대 삼성전자가 당시 연구원이던 진대제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 회장(전 삼성전자 사장) 사진을 전면 광고로 실었던 게 떠오르네요. 삼성전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엔지니어를 내세운 겁니다. 대학생이던 제가 반도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도 진 회장 같은 롤모델 덕분이에요.”
미스터 디지털(Mr.digital)로 불리는 진 회장은 한국 반도체 신화의 주역이다. IBM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중 동향(경남 의령)인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의 스카우트 제의로 삼성전자에 입사해 사장까지 승진했다.
▷요즘엔 이런 롤모델이 보이지 않습니다.
“연봉제 또는 호봉제에서 한국 엔지니어는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아무리 잘해야 승진을 통해 월급을 조금 더 받는 것인데, 의사를 하거나 변호사를 해서 돈을 더 많이 버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죠. 이런 시스템에선 꿈과 비전을 줄 수 없습니다.”
▷만약 고3 수험생 자녀가 있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잠시 고민한 뒤) 미국에선 무조건 공대를 보낼 겁니다. 어릴 때부터 수학을 가르치고 성공한 정보기술(IT)업계 경영자를 보여주면서 공학도의 꿈을 키워줬을 것 같아요. 다만 한국에선 여전히 의대에 가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그럼에도 공학도의 매력은 무엇입니까.
“심리학자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추론 및 수리적 능력을 좌우하는 ‘유동지능’은 만 25세에 정점을 찍는다고 합니다. 지혜에 관여하는 결정지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쌓이죠. 인문학적 지식이 나이가 들수록 빛을 발한다면 수리적 능력은 젊을 때 최고점을 찍는데, 이런 ‘골든타임’을 놓쳐선 안 됩니다. 이공계 출신이 나중에 경영학을 공부하는 건 가능하지만 경영학도가 나중에 공학을 연구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이유죠.”
▷현장에서 이공계 인재 부족을 느끼나요.
“심각할 정도로 인재가 부족합니다. 절대적 숫자보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필요한 인재’가 부족합니다. 전 세계 인재가 몰리는 미국, 1년에 대학 졸업자가 1000만 명인 중국과 비교가 안 될뿐더러 한국은 그나마 훌륭한 인재도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고요. 미국식 직무급제를 도입해 훌륭한 인재를 한국에 머물게 해야 합니다.”
■ 이석희 사장은…
△1965년 서울 출생
△1988년 서울대 무기재료공학과 졸업
△1990~1995년 현대전자 선임연구원
△2001년 미국 스탠퍼드대 재료공학 박사
△2000~2010년 인텔 기술·프로세스 통합그룹 리더
△2010~2013년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
△2013년 SK하이닉스 미래기술연구원장
△2018년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
△2024년 SK온 대표이사 사장
김우섭/안시욱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