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관계는 어느 한쪽의 죽음으로 실 끊어지듯 단절되지 않는다. 특히 가족 관계에 있어서는 누군가의 죽음이 또 다른 물리적, 감정적 미수금으로 남아 살아남은 이들을 지옥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자비에 르그랑 감독은 장편 데뷔작 <아직 끝나지 않았다>(2017) 때부터 부자 관계의 악연에 관심을 보였다. <후계자>도 마찬가지다. 잘 나가는 패션 디자이너 엘리아스(마크 앙드레 그롱당)는 그동안 관계가 소원했던 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듣는데 이후 전개되는 과정은 감독의 전작 제목처럼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남긴 물건들을 자선 단체에 기부하려고 집 곳곳을 살피던 엘리아스는 지하실에서 기겁할만한 상황과 맞닥뜨린다. 살아생전 아버지가 납치한 듯한 누군가가 갇혀있다! 911에 신고하면 조금 불편하긴 해도 해결됐을 상황이 엘리아스가 처한 사회적 지위 때문에 '미로'와 같은 해결 불능의 상황으로 빠져든다.

이는 오프닝에서 이미 암시된 바였다. 엘리아스의 패션쇼는 런웨이가 독특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관객이 회오리 형태로 착석한 상태에서 모델들이 그사이를 지나간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카메라에 비친 이 광경은 미로와 같다. 그래서일까. 패션쇼가 끝난 후 엘리아스가 마지막 인사를 하려 이 런웨이를 지나갈 때면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끊임없이 뛰어가는 것으로 연출되어 있다.
영화 '후계자' 포스터. / 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후계자' 포스터. / 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후계자' 스틸 컷. / 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후계자' 스틸 컷. / 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
이제 엘리아스는 패션 잡지 바자의 표지를 장식할 예정이다. 그의 미래는 창창대로인 것만 같다. 아버지의 죽음과 비밀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터다. 본인도 이 사실을 아는 까닭에 아버지의 집에서 젊은 여자를 발견하고는 신고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하면 벌어질 후폭풍, 자신이 벌인 일은 아니어도 명성을 얻는 디자이너로서 받을 타격이 엘리아스에게 현명한 선택을 할 기회를 앗아갔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 엘리아스가 아버지 때문에 걱정했던 건 유전일지 모르는 심장병이었다. 지병과 관련한 DNA는 고약한 데가 있어서 당사자가 아무리 해결하려 해도 본인의 힘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어 무력감에 빠뜨리고는 한다. 근데 유전병보다 더 무시무시한 아버지의 이중생활이라니!
영화 '후계자' 스틸 컷. / 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후계자' 스틸 컷. / 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
자비에 르그랑의 세계에서 아들은 아버지가 설계한 폭력의 미로에서 웬만하면 헤어 나오기 힘들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어린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기회가 있었다. 경찰이 도움이 될 줄 알았다. 웬걸, 경찰은 가족의 일이라는 이유로 개입을 망설일 뿐 아니라 오히려 떨어져 있던 아들을 아버지에게 데려가 절망을 안긴다. 상황만 바뀌었을 뿐이지 <후계자>의 엘리아스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아들과 다르지 않다.

부자 관계, 그중에서도 가부장의 폭력에 집중하는 이유에 관해 자비에 르그랑은 이렇게 설명한다. "남성은 어떻게 남성에게조차 최악의 상대가 되었을까요? 오늘날 가부장제가 여성과 아이들을 어떻게 억누르는지 관찰하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그것이 전승되고 초월한다는 특징 때문에 같은 남성, 형제, 아들까지 억압한다는 점은 분명하지 않고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혈연사회를 신성시하고 절대 끊을 수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영화 '후계자' 스틸 컷. / 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후계자' 스틸 컷. / 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
국내 제목은 '후계자'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실은 '상속자(The Successor)'가 더 적합해 보이는 이유는 감독의 인터뷰 때문이다. 아버지의 집에서 뒷정리하던 엘리아스에게 생전에 아버지와 친하게 지냈다며 찾아오는 친구는 이런 말을 전한다. “죽은 자는 산 자들 사이에서 영원히 살아간다.” 그건 꼭 가족 관계에서만 유효한 대사는 아니다. 아버지의 친구도 언젠가 엘리아스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이 남길 충격파는 오랜 시간 괴롭힐 것이어서다.

우리는 모두 관계에 있어서 유무형의 영향을 받는 상속자다. 엘리아스의 바자 커버 이미지는 노란색 옷을 입은 세 명의 여자 모델 사이에 둘러싸인 검은 옷의 엘리아스다. 아버지의 비밀이 세상에 알려지면 엘리아스는 물론이고 이들 여성이 받게 될 정신적인 충격도 클 터다. 아버지가 젊은 여성을 납치해 안긴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어도 엘리아스 역시 본인의 경력을 위해 여성을 착취한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다를 바 없다. 대물림되는 폭력의 형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 끝을 볼지 모른다. <후계자>는 지옥이라는 관계의 미로에 관한 영화다.
영화 '후계자' 스틸 컷. / 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후계자' 스틸 컷. / 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
허남웅 영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