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하면 산토리니로 대표되는 파란 바다, 새하얀 집을 떠올리며 낭만에 젖게 된다. 반면 국가 부도 위기를 맞기도 했던, 재정이 여전히 취약한 나라 이미지도 남아있다. 그러나 서양문명의 자궁으로서의 위용은 변함이 없을 터. 클래식 쪽에서는 5인이 우뚝해 보인다. 영원한 디바 마리아 칼라스(1923~1977)는 본디 그리스계 미국인 소프라노다. 아테네왕립음악원에서의 담금질이 그녀의 자양분이었다. 지휘자로 50년대 뉴욕필을 이끈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1896~1960)가 있고, 현존 인물로는 테오도르 쿠렌치스(1972~ )를 빼놓을 수 없다. 급진적 해석과 극단적 콘트라스트로 명성과 악명이 혼재한다. 바이올린에는 레오니다스 카바코스(1967~ ), 정확하고 학구적이다. 그리고 아그네스 발차(Agnes Baltsa(1944~ )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스적인 마성의 메조소프라노.
발차는 독일과 인연이 깊다. 뮌헨 음대를 졸업하고 1968년 프랑크푸르트 오페라좌에서 데뷔했다. 50년 넘게 해로하고 있는 남편도 베이스 귄터 미센하르트(1939~,獨). 그리스인들은 가장 위대한 디바로 아그네스 발차를 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아그네스 발차의 1988년 44세 때 모습 / 사진출처. 독일위키피디아
애국심 가득찬 발차는 오페라 프리마돈나 외에 그리스 민요와 가요에도 관심이 컸다. 그중 1986년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이례적으로 발매한 앨범이 눈에 띈다. 여기에 유명한 ‘기차는 8시에 떠나네’가 들어있다.
1988년 DG에서 나온 아그네스 발차의 음반 / 사진출처. 유튜브 캡처
레지스탕스 청년과 연인은 카테리니(Katerini)로 떠나기로 약속한다. 11월 어느 날 역에서 여자는 남자를 기다리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출발시간은 다가오고, 비통한 심정의 여자는 기차에 오른다. 숨어서 지켜본 그에겐 임무가 있다. 군부독재에서 억압받는 민중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메조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가 부르는 ‘기차는 8시에 떠나네’와 ‘우리에게도 밝은 날이 올 거야’]
“기차는 8시 떠나요. 카테리니(*아테네 북쪽 소도시)행 기차예요. 다시 11월은 오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8시를 기억하지 않네요. 카테리니행 기차를 말이에요. 11월은 이제 오지 않을 텐데... 난 당신을 우연히 봤어요. 레프테리/Lefteris(주점 이름)에서 우조(*ouzo,한국으로 따지면 소주)를 마시고 있더군요. 그날 밤은 다른 곳에선 오지 않을 거예요. 당신만의 비밀을 간직하기 위해 말이에요. 그리고 그 비밀을 아는 이를 기억하기 위해서라도요. 기차는 8시에 떠나요. 그러나 당신은 혼자 남았네요. 카테리니에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요. 짙은 안개 속에서, 5시부터 8시까지던가요? 당신 가슴이 품고 있는 무기가 되어버린. 카테리니에서의 그 임무를 마치기 위해서.”
여기서 카테리니는 중의적(重義的)으로 쓰였다. 실제 지명이면서 떠나는 사람(여자)과 남는 사람(남자), 이별과 그리움의 상징적 장소다.
원래 이 노래는 그리스의 국민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1925~2021)가 1972년 만든 곡. 군사정권(1967~1974) 시대, 민중가요로 퍼지면서 유명해졌다. ‘떠나는 기차’는 자유·사랑·희망이 억압 속에서 멀어져 간다는 메타포다. 이별·기다림·향수 등 일상의 정서로 이를 에둘러 표현한 것. 영상 속 두 번째 곡 ‘우리에게도 밝은 날이 올 거야’도 ‘기차는 8시에 떠나네’와 쌍벽을 이루는 유명한 노래로 역시 테오도라키스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