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사를 누린다’는 표현이 있다. 피아노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5년마다 최대한의 ‘호사’를 느낄 수 있는 거대한 예술 축제가 방금 끝을 맺었다. 인터넷 생중계로 어지간한 콩쿠르는 실시간으로 감상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물이 오를 대로 오른 핫한 쇼팽의 해석을 맛보고 작품과 연주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창의적으로 이루어지는 바르샤바 쇼팽 국제 콩쿠르의 무대는 자타공인 세계 최고의 자리다. 햇수로 세어 곧 한 세기를 맞이하게 되는 쇼팽 콩쿠르는 최강의 연주력을 시험하는 동시에 역대 입상자들의 면면을 통해 미래를 예견하게 되는 대회가 되었다.
역대급으로 상향 평준화되었다는 평가를 받은 이번 제19회 대회에서는 6위까지의 입상자 중 폴란드인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동양인들이 상을 받았다. 그중 중국계 음악인들이 주요 등위를 모두 차지한 것에 대해 의아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겠지만, 대체로 받을 만한 사람이 받았다는 중론이다. 챔피언을 차지한 미국의 에릭 루는 올해 27세로, 10년 전인 2015년 같은 대회에서 4위에 입상한 바 있다. 그 후 2018년 영국 리즈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당당히 프로 연주자로 활약하기 시작한 그가 지금까지 쌓아 온 ‘계급장’을 모두 떼고 다시 도전 무대에 선 것은 입상 직후 언급한 피아니스트로서의 진정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작품 앞에 겸허하고 꾸밈없이 작곡가와 영혼의 소통을 나누려 애쓴 루의 모습은 그 자체로 존경스러웠다. 3라운드에서 연주한 바르카롤은 우아하고 귀족적이었으며 작품 56의 마주르카 세 곡은 자의식을 깔끔하게 배제한 채 오로지 리듬과 멜로디의 적절한 배합에 힘쓰며 완성도 높은 연주를 들려주었다. 앞서 2라운드에서 들려준 연주 중에서는 '소나타 2번 작품 35'가 하이라이트였다. 아름다우면서도 처절한 ‘장송행진곡’의 음표들 앞에서 그곳의 청중들은 아마도 할 말을 잊었으리라 생각된다. 모든 음을 오로지 작곡가의 메시지로만 전달하려는 루의 노력은 협주곡을 연주하는 결선까지 그 빛을 잃지 않았으며, 이로써 그는 45년 만에 쇼팽의 '협주곡 2번 f단조'를 연주해 우승하는 기록을 남겼다.
제19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에릭 루(왼쪽)가 이달 21일 협연을 마친 뒤 지휘자 안제이 보레이코와 함께 인사하고 있다. / 사진. ⓒ EPA/연합뉴스
2위를 차지한 케빈 첸은 대회 초반부터 큰 인기를 자랑했다. 제네바 콩쿠르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 첸은 가볍고 정확한 테크닉을 무리 없이 구사하는 피아니스트다. 그의 무대 중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2라운드에서 연주한 '열두 개의 연습곡 작품 10'이었다. 탄력 있는 손놀림의 정확도는 물론이고 작품에서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다이내믹을 정교하게 구사하는 모습은 놀라움을 자아냈다. 음색도 기억에 남는데, 첸은 자신만의 소리를 만들어내기보다 악기가 지닌 고유의 음향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을 찾아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제19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최종 2위를 차지한 중국계 캐나다인 케빈 첸. / 사진제공. 쇼팽 인스티튜트
3위의 지통 왕은 시종일관 ‘큰 그릇’이 느껴지는 피아니스트였다. 다른 참가자들과 조금 차별되는 프로그램을 꾸몄던 3라운드 무대가 특별했는데, '왈츠 E장조'는 사랑스러웠고 작품 12의 '변주곡 B 플랫 장조'는 작품이 지닌 소담스러운 아름다움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 결선에서 대회 최초로 마련된 솔로곡이자 필수 프로그램 ‘환상’ 폴로네즈에서 다소의 흔들림을 보였으나 끝까지 중심을 잃지 않고 협주곡을 소화해 갈채를 받았다.
결선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우리나라 연주자들의 활약도 눈부셨다. 음악 외에도 체스 등 다방면에 능한 천재 형제로 알려진 이혁과 이효 형제는 각각 다른 개성으로 현지 청중을 매료시켰다. 2021년에 이어 두 번째 도전이었던 이혁은 전 대회에 비해 일취월장한 성숙함과 균형감을 소나타 3번의 완숙한 연주에서 뽐냈다. 자신감있고 당찬 해석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나타낸 동생 이효의 피아노 소나타 1번은 흔치 않은 선곡과 주관이 뚜렷한 해석이 동시에 빛을 발한 무대였다. 섬세히면서도 관조적인 자세, 아름다운 음색의 쇼팽을 들려준 이관욱의 무대도 오래 기억할 만하다
제19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최종 3위를 차지한 지통 왕. / 사진제공. 쇼팽 인스티튜트
참가자들만큼이나 귀추가 주목되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면면이다. 17명의 심사위원은 그야말로 쇼팽 콩쿠르의 산증인이자 역사인데, 이 중 세 명에게는 이번 대회가 더욱 특별하지 않았을까 한다. 미국인 최초로 심사위원장을 맡은 게릭 올슨은 1970년 대회의 우승자다. 클라우디오 아라우를 사사하며 베토벤과 브람스에도 탁월하지만 역시 올슨의 본령은 쇼팽이다. 1990년대부터 꾸준히 녹음된 그의 쇼팽 전곡 시리즈 음원은 오래도록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이 분야의 교과서다. 밝고 따뜻한 음색으로 낙천적인 쇼팽을 노래하는 게릭 올슨은 자신이 심사위원장을 맡은 첫 대회에서 미국인이 우승을 차지했기에 그 기쁨이 더 크지 않을까 생각된다.
2021년 브루스 리우, 올해 에릭 루 등 우승자 두 사람을 길러내며 쇼팽 콩쿠르를 움직이는 주요 인물 중 하나가 된 베트남의 당 타이 손은 그러나 자신의 입지를 이룩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야 했다. 최근의 인터뷰에서 그는 1980년 우승 당시 미숙했던 점을 떠올리며 “다른 사람들처럼 국제적인 커리어를 만드는 대신 공부가 너무 부족했던 나는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차라리 우승이 아닌 2등을 받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고 언급했다.
바로 그 해, 17세의 나이로 참가해 결선까지 올랐지만, 상을 받지 못했던 피아니스트가 케빈 케너였다. 우연의 일치인지 케너 역시 10년 후인 1990년 대회에 참가해 1위가 없는 2위를 차지하며 ‘재수’의 한을 풀었다. 늘 학구적이고 끊임없이 쇼팽의 새로운 해석과 창조적인 자세를 연구하는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인 케너의 모습에서 지금의 에릭 루가 겹쳐 보이기도 한다.
1970년 쇼팽 콩쿠르의 우승자로 이번 대회의 심사위원장을 맡은 게릭 올슨. / 사진 출처. 쇼팽 국제 음악 콩쿠르 페이스북 캡처
쇼팽 콩쿠르 2021년의 우승자 브루스 리우와 올해의 우승자 에릭 루의 스승인 피아니스트 당 타이 손. / 사진. ⓒ 마스트미디어
도대체 어떤 것이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쇼팽의 해석일까? 생각할수록 갈피를 잡기 어려운 질문에 대해 나 스스로 민족적 특질에 대한 논리를 내세웠던 적이 있었다. 건강미와 전통적 요소를 앞세우는 폴란드, 고상하면서도 우아한 서정성을 나타내는 프랑스, 비극적 정서와 탁월한 기교적 능력으로 음영의 깊이를 더하는 러시아, 밝고 외향적인 동시에 피아니스틱한 효과를 놓치지 않는 신대륙의 스타일 등은 글로벌 시대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가치 판단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2015년 조성진의 우승부터 이어지고 있는 아시아인들의 약진이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 잡게 될까. 동양인들의 장점도 이미 모든 것이 증명되었다. 쇼팽의 텍스트를 다루기에 적절한 손의 크기와 모양, 슬픈 감성 표현에 능한 성향과 동양적 모럴에서 오는 내성적인 기질 등은 유럽의 무대를 지금껏 놀라게 해 온 피아니스트들의 특질이다. 평소 쇼팽의 음악에서, 동양화에 나타나는 넓은 여백을 느껴야 한다고 주장해 왔는데 이제는 ‘남기는’ 것이 아니라 적절히 ‘채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기교적인 능력, 템페라멘트의 표출, 시대적 양식의 고증, 논리에 의한 구조 설정 등 모든 것이 과하지 않게, 다시 말해 쇼팽을 만나려는 사람의 생각과 감상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혜안이 요구되는 것이다.
결국 쇼팽의 세계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덕목은 ‘중용’이며, 누구보다도 멋진 중용의 길을 찾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현명한 음악인의 자세다. 매일 스스로를 다스리며, 끊임없이 쇼팽과 대화를 나누며 노력하는 젊은이라면 누구나 쇼팽 콩쿠르의 높은 문을 넘을 자격이 있다. 아무쪼록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나만의 쇼팽을 찾길 바란다.
제19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결선에서 연주 중인 피아니스트 에릭 루 / 사진제공. 쇼팽 인스티튜트
김주영 피아니스트/서울사이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