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달린 한국의 첫 바퀴, 현대차 포니 [명차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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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차의 발견 (1)
현대차 포니, 첫 국산 고유모델
1439cc 엔진에 이탈리아 디자인 적용
개발에서 양산까지 불과 2년9개월
1976년 첫 수출, 60개국 6만여 대 판매
단순 조립 넘어 독자 설계·생산 체제 구축
현대차 포니, 첫 국산 고유모델
1439cc 엔진에 이탈리아 디자인 적용
개발에서 양산까지 불과 2년9개월
1976년 첫 수출, 60개국 6만여 대 판매
단순 조립 넘어 독자 설계·생산 체제 구축
엔진과 변속기는 일본, 디자인은 이탈리아. 국제 협업의 실험장이 된 이곳은 ‘국산 고유 모델’을 현실로 만들겠다는 의지로 들끓었다. 이듬해인 1975년 12월 공장 라인 끝에서 은회색 차 한 대가 미끄러져 나왔다. 트렁크엔 'HYUNDAI' 일곱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한국 첫 고유 모델 ‘포니’의 탄생이었다.
포니는 국내 자동차 산업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남겼다. 기술 자립의 출발점이자 국민의 첫 ‘마이카’로 산업화의 상징이라는 점에서다. 1970년대 수출주도 성장 한복판에서 한국 자동차 수출의 처음 물꼬를 튼 것도 포니였다. 포니는 부품을 수입해 조립만 하던 현대자동차를 ‘글로벌 톱3 메이커’로 성장시킨 첫 단추기도 했다.
1439cc 4기통 엔진 장착
‘한국 최초의 국산차’로 불리는 포니는 현대차가 처음으로 독자 개발한 차량이다. 포니에는 한국, 일본, 이탈리아의 기술이 총동원됐다. 포니는 1439cc 4기통 엔진에 최고속도 시속 155km, 최대출력 80마력으로 당시 국내에선 찾기 힘든 사양을 갖췄다. 그때만 해도 국내 생산 차량의 평균 최고속도는 시속 120km 남짓이었다.
정주영의 결단이 만든 포니 신화
1970년대 초만해도 한국은 자동차 불모지에 가까웠다. 1인당 국민소득 290달러로 자동차는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자동차 산업도 독자 개발은커녕 외국 회사 부품을 사서 조립하는 수준에 그쳤다.자동차 국산화의 첫 발을 뗀 건 1973년부터다. 당시 현대차는 포드의 코티나를 완전분해제품(CKD) 방식으로 국내에 판매했는데 합작사 설립을 두고 포드와 협상에 난항을 겪었다. 자본금 납부가 늦어지는 데다 주요 부품을 국산화하기로 한 약속을 포드가 철회하려 하면서다. 포드는 현대차가 조립한 코티나가 잦은 고장을 내자 “한국의 비포장 도로 때문”이라고 황당한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자 정주영 현대차그룹 창업회장은 “우리 스스로 자동차를 만들어보겠다”며 독자 모델 개발을 선언했다. 그 결단이 포니 프로젝트였다.
2년9개월의 질주, 포니 프로젝트
그 해 3월 개발이 시작된 이후 이탈리아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있는 회사 ‘이탈 디자인’과 디자인 용역 계약을 맺었다. 그는 폭스바겐 ‘골프’ 등을 디자인한 30대 유망주였다. 주지아로는 한국에 들어와 50명의 현대차 엔지니어들과 함께 포니 프로젝트를 맡았다.
출시 첫해 점유율 43.5%
포니는 출시되자 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출시 첫해인 1976년 1만726대가 팔리며 그해 전체 승용차 판매량(2만4618대)의 44%를 차지했다. 포니 픽업, 왜건, 포니2 등 후속 모델 출시로 1982년에는 누적 판매 대수 30만대, 그 해 점유율 67%를 차지하기도 했다. 1980년대 경제 성장과 맞물려 포니는 ‘마이카’ 시대를 여는 핵심 주역이었다.
글로벌 진출 신호탄을 처음 쏜 것도 포니였다. 1976년 7월 에콰도르에 포니 5대를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1985년 말까지 중동, 아프리카, 남미, 캐나다, 서유럽 등에 6만7387대의 포니를 내보냈다. 당시 수출 대상국은 60개국에 달했다.
여기에 부품 90% 이상을 자체 제작하거나 국내 부품 업체에서 조달했다. 그 결과 부품업체들이 늘어났고, 철판을 찍고 유리를 굽히는 공정이 국내에 자리 잡았다. 완성차 공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발굴한 부품업체만 전국 약 430개에 달했다.
양길성 기자 vertig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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