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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끌고 산으로 들어간 남자…15년간 '자연인' 된 사연이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절규' 그린 뭉크보다 사랑받는
노르웨이 국민 화가
하랄 솔베르그(Harald Oskar Sohlberg)
노르웨이 국민 화가
하랄 솔베르그(Harald Oskar Sohlberg)
좋은 그림입니다. 고요한 분위기, 푸른색의 색조 덕분에 보는 사람의 마음도 편안해집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정도로 좋은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 확실히 ‘산속의 겨울밤’에는 ‘절규’처럼 보는 사람을 곧바로 사로잡는 강렬함은 부족합니다. ‘절규’의 인지도가 훨씬 높은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지도 밖으로 떠난 길
솔베르그의 어린 시절은 남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모피를 사고팔아 큰 돈을 번 장사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솔베르그에게 웃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너는 참 좋겠다. 좋은 집에서 태어나서 공부만 하면 되잖아.” 그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솔베르그의 공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줬습니다. “법률가가 돼도 좋고, 학자가 돼도 좋다. 뭐든 밀어주마.”
하지만 솔베르그는 뜻을 꺾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마침내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그래, 네가 정 그렇게 살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라. 다만 그냥 화가는 안된다. 간판을 그리고 건물을 장식하는 공방에 들어가서 기술을 배워. 기술이 있어야 밥을 굶지 않는다.”
솔베르그는 아버지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술자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아버지를 실망시킬 수는 없는 법. 그는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여 성실하게 그림 기술을 갈고 닦았습니다. 그렇게 솔베르그는 붓을 다루는 기술, 색을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삶은 해가 진 뒤에 시작됐습니다. 동료들이 일을 마치고 놀러 가는 시간, 솔베르그는 예술학교로 향해 야간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낮에는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공부하는 생활이 4년간 지속됐습니다. 그리고 솔베르그는 아버지를 찾아가 다시 말했습니다.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저는 화가가 되고 싶습니다.”
단 하나의, 영원한 풍경
이제 솔베르그는 마음껏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 존경하던 노르웨이 예술가들을 찾아가 그림을 배웠고,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떠나 그곳의 미술학교에 다니며 새로운 유럽 미술의 흐름도 접했습니다. 그가 특히 마음에 들어 했던 건 아름다움 그림 속에 삶의 의미를 숨겨 놓은 상징주의 작품이었습니다.
서른 살이 되던 해, 그는 답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목적지는 론다네 산. 문명에서 동떨어진 거칠고 장엄한 곳이었습니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솔베르그는 스키를 타고 홀로 설원을 나아갔습니다. 주변에 쌓인 눈 덕분에 온 세상이 고요했습니다. 자신의 숨소리와 뽀드득거리는 눈 소리, 가슴 깊숙이 스며드는 차가운 공기, 시간이 지나면서 빛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의 색깔…. 감각은 전에 없었을 정도로 곤두서 있었습니다. 덕분에 솔베르그는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 앞에 뭔가가 있다는 사실을요.
솔베르그는 단순히 경외감으로만 표현할 수 없는 뭔가가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습니다. 그 풍경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한한 우주 속 영원한 시간의 흐름 앞에서 얼마나 하찮은지, 하지만 그 거대한 흐름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말없이 보여주는 하나의 계시였습니다. 평생을 바쳐 그려내야 할 풍경은 그렇게 솔베르그의 마음속에 새겨졌습니다.
15년간의 여행
산을 그리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하는가. 솔베르그는 생각했습니다. ‘먼저 산을 속속들이 알아야 해.’ 그래서 그는 가장 직관적이고 순수한 방법을 택했습니다. 자신이 그 산의 일부가 되는 것이었지요. 솔베르그는 아내와 함께 론다네 산기슭 마을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작업에 착수했습니다.그는 매일같이 산을 관찰하고 그 풍경을 그렸습니다. 수많은 습작이 만들어졌다가 버려졌습니다. 목탄, 크레용, 수채화, 유화…. 솔베르그는 자신이 쓸 수 있는 모든 재료를 총동원했습니다. 하지만 산은 침묵했고, 그날 밤 느낀 전율은 캔버스 위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아직 솔베르그에게는 산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뢰로스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첫해, 솔베르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슬픔에 빠진 그는 교회 묘지를 보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다시 생각합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뢰로스 교회는 이상한 건물이다. 그것은 산 자들의 집과 죽은 자들의 집 사이에 칼날처럼 날카로운 경계선이 돼 서 있다.” 그 모습을 그리며 솔베르그는 삶과 죽음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그렇다고 어려운 일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1905년 아들이 태어난 건 그의 삶에 희망의 빛을 비췄습니다. 솔베르그가 겪은 이 모든 희로애락은 그의 그림에도 그대로 녹아들었습니다. 이제 그는 더 깊어진 눈으로 론다네의 밤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수 년 전 그는 단순히 신비로운 풍경을 마주하고 감동을 받은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사랑과 죽음, 고난과 탄생을 모두 겪은 성숙한 인간이 됐습니다.
솔베르그는 전경의 나무들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자 그 모습은 마치 바깥 세상과 풍경을 가르는 무대의 커튼처럼 보였습니다. 밤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그는 사랑의 행성인 금성을 띄웠습니다. 이 기나긴 작업을 가능하게 한 아내에게 바치는 감사였습니다. 캔버스 위에 펼쳐진 푸른빛은 더 이상 그날 밤 눈에 본 색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또 새롭게 맞이했던, 한 사람의 삶이 녹아들어 있는 깊고 투명한 색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림이 완성됐습니다. 솔베르그의 나이는 어느덧 마흔다섯. 처음 산의 풍경을 그리기로 마음먹은 지 15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그림에 담은 노르웨이의 영혼
그림은 공개되자마자 노르웨이인들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노르웨이 밖에는 솔베르그라는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0세기 초 유럽 미술계는 혁명과 파괴, 재창조의 용광로였습니다. 파리에서는 피카소가 입체주의로 형태를 해체하고 있었고, 같은 나라의 뭉크도 인간 내면의 불안을 절규하듯 토해내며 표현주의의 새 길을 열고 있었습니다. 역사에 남는 건 언제나 새롭고 화제가 되는 일을 한 사람들. 하지만 솔베르그의 작품은 주목받기에는 너무 수수했고, 기존 미술의 규칙을 파괴하는 파격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결코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연구 성과로 학계를 뒤흔들고 특허로 떼돈을 버는 ‘스타 교수’가 있습니다. 화가로 치면 피카소나 뭉크입니다. 반면 오랫동안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며 사랑으로 학생들을 지도한 ‘참된 스승’들이 있습니다. 솔베르그가 그렇습니다. 물론 전자도 세상에 기여하는 위대한 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자가 전자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이번 기사는 'Harald Sohlberg: Infinite Landscapes'(노르웨이 국립미술관 펴냄), Store norske leksikon, Norsk biografisk leksikon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