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의 궤적은 사시사철을 겪으며 성장에서 수렴에 이르는 자연계 생물의 주기와 닮았다. 예로부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릴 줄 아는 동양의 문인들은 자연에 인간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빗대었다. 특히 사계절 중 가을에 이르면, 인생의 진정한 절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하며 결국 유한에 이르는 인간의 생사관을 조망하는 사색적이고 반성적인 비유를 많이 남겼다. 누구나 청량한 하늘과 드높은 구름, 곱게 물든 낙엽, 주변을 물들이는 붉은 낙조를 보면 가을의 운치가 좋으면서도, 꽃피는 청춘기, 뜨거운 여름을 보내기에 아쉽고 보내고 내려놓고 정리해야 할 것만이 수북이 남은 가을과 겨울이 유독 쓸쓸해지는 것은 만고불변의 이치인가 보다.
故 유리지(1945-2013)는 한국 추상미술 1세대 유영국의 장녀로 미국 1974년 미국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템플대학교 타일러 미술대학(Tyler School of Art, Temple Universiyty)에서 유학했다. 신진 금속 제조 기술과 조형 방법론을 배우고 귀국 후에는 작가, 교육자, 박물관인으로 누구보다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활동하며 금속공예 전문 교육 기관이나 시장도 변변찮았던 한국 현대공예의 수준을 견인하는 데 기여했다. 치밀한 장인정신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수준 높은 금속공예기와 장신구를 제작하여 작가로서도 동료,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영향력을 기려 2022년 서울공예박물관에서는 <유리지 작가 회고전>을 열었고, 2023년 서울시에서는 유리지공예상을 제정했다.
서울공예박물관 <사유하는 공예가 유리지 : 금속공예 기증 특별전> 전시장 전경 (2022. 9.27.~11.27.)
다방면으로 펼쳤던 활동이 다소 안정기에 접어들던 1980년대 초, 작가는 한층 조형성을 강조한 작품들을 다수 제작했다. 지식과 경험을 쌓는데 바빴던 20대, 해야 할 일과 인간관계에 집중했던 30대를 지나 인생의 수많은 시험을 치르고 자리 잡기 시작한 40대에 들어섰으니, 이제는 한 인간의 삶과 작가로 맺어야 할 열매에 대해 고민하고 집중할 때임을 직감했던 걸까?
이 당시 제작한 <밀물>, <섬풍경>, <여름밤-하늘>, <노을Ⅱ(SunsetⅡ>(1983) 등의 작가의 초기 금속 조형물은 한국미술의 주요한 특징인 자연미와 서정 어린 심상의 표현이 잘 살아있다. 기능과 실용성을 우선하느라 타협 혹은 제한했던 기물의 형태와 구조를 자신의 눈으로 보았거나 기억하는 산, 들, 수변, 갯돌의 형태로 재현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형태와 구성을 만들었다. 더불어 새, 개구리, 물고기 그리고 소녀 등을 등장시켜 자연과의 공존공생(共存共生)하는 삶의 지향을 반영했다. 수면 혹은 지면 위로 봉긋 솟아오른 둥근 돌, 산, 언덕 그리고 굽이 흐르는 물길 그리고 그 뒤에 걸친 달의 형상은 직선보다 곡선을 추구했던 한국미술의 유기적인 형태의 추구를 계승한다.
나는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이것들을 보다 본질적인 형상으로 담아낼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 故유리지 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