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과 노래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자료를 살피다 보면, 뜻밖의 결과를 종종 보게 된다. 서울을 소재로 만들어진 노래가 많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부산이나 목포 같은 도시의 노래 역시 적지 않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나 <목포의 눈물> 같은 예를 떠올리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반면 광역시인 광주나 대구 관련 노래가 많지 않음은 다소 뜻밖이라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의외성 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역을 꼽자면 단연 충청남도 부여를 먼저 들어야 한다.
광역시는 고사하고, 부여는 시도 아닌 군이다. 당연히 인구가 많지 않은 것은 물론 경제적으로 크게 돋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노래로 보자면 부산, 목포 부럽지 않게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효율성(?) 좋은 곳이 또 부여다. 2014년에 발표된 ‘한국 대중가요 고전 33선’ 중 하나로 꼽힌 <꿈꾸는 백마강>이 부여 노래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고, 그 밖에도 백을 훨씬 넘는 대중가요가 그 뒤 목록을 채우고 있다.
2015년 제작 <부여 가요 대전집> 초판 표지 / 제공. 이준희
가사와 곡조가 확인된 작품의 악보집과 저작권 문제까지 해결된 작품의 CD(증보판은 USB)로 구성된 <부여 가요 대전집>에는 100여 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꿈꾸는 백마강> 못지않게 중요한 작품으로 살펴야 하는 것이 <낙화암>이라는 노래다. 초판에는 수록되지 않았다가 증보판에 비로소 담긴 <낙화암>은 1933년 녹음됐다. 또 작품이 만들어진 때가 지금으로부터 백년도 더 전인, 근대 이후 부여 노래의 첫 출발이기도 한 역사적 작품이다.
1933년 7월에 오케(Okeh)레코드에서 발매된 <낙화암>은 극 음반의 일부인 삽입곡으로 수록됐다. 전설적인 만담가 신불출(申不出)이 일인이역으로 열연한 극 <낙화암> 후반에 서상석(徐祥錫)과 백화성(白華星)이 함께 부르는 노래가 등장한다. 음반에는 노래의 작자 이름이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다른 자료를 통해서 <낙화암> 가사를 쓴 이가 다름 아닌 이광수(李光洙)임을 알 수 있다. <무정>을 비롯한 여러 소설로 한국 문학사에 불후의 이름을 남겼지만, 적극적인 친일 행위로 오명 또한 만만치 않은 그 춘원 이광수다.
<삼천리> 1933년 4월호에 실린 <낙화암> 가사 / 제공. 이준희
<낙화암>은 대중가요라 하기는 곤란한 노래이지만 웬만한 대중가요 이상으로 많은 이들의 애창곡이 되었고, 특히 지식인층에서 즐겨 불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가 이중섭(李仲燮)이 <낙화암> 애창자로 특히 유명한 인물인데, 그 사연을 소개한 기사들을 보면 그냥 넘길 수 없는 중대한 오류가 또 발견되기도 한다. 노래 작자를 소개하면서 이광수 작사라 한 것은 앞서 본 바와 같이 맞지만, 작곡자가 안기영(安基永)이라 한 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낙화암> 곡조는 일본 노래, 그것도 상당히 유명한 일본 가곡이기 때문이다.
<낙화암> 멜로디의 원작은 일본 작곡가 야나다 타다시(梁田貞)가 1911년쯤에 지은 <晝の夢(한낮의 꿈)>라는 곡이다. 오래전에 만들어졌으나 지금 들어도 전혀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 유려한 선율은, 황폐한 터와 서글픈 전설만 남은 망국의 정경을 더듬는 가사와 잘 어울린다. 그 어울림이 워낙 자연스럽기에 안기영 작곡이라는 낭설이 오랫동안 유통되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각 절 마지막에 반복되는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 대목은 우아한 비감(悲感)을 조성하기에 충분하다.
'조선일보' 1926년 8월 15일자에 실린 <낙화암> 방송 안내 / 제공. 이준희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21년에도 <낙화암>이 연주된 공연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부여 바로 북쪽에 위치한 청양에서 8월에 열린 음악회를 소개한 기사 중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나 하는 곡조’ <사비수(泗沘水)>가 불렸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사비수>는 <사자수>와 사실상 같은 제목이며, ‘사비(泗沘)’와 ‘사자(泗泚)’의 글자 형태가 유사한 데에서 비롯한 혼용이다. 이때 불린 노래 곡조가 야나다 타다시의 작품이라는 명시적 증거는 없지만, 이광수 가사에 다른 멜로디가 붙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으므로, 일단은 그렇게 추정해 볼 수 있다.
'조선일보' 1921년 9월 5일자에 실린 <낙화암> 공연 기사 / 제공. 이준희
1921년 8월 이전부터 불리고 있었음이 거의 분명한 <낙화암>은, 그럼 언제 처음 만들어졌을까? 이광수가 가사를 쓴 때는 언제이고, 가사과 곡이 만난 때는 또 언제였을까? 일단 가사가 만들어진 때는 아마도 1917년 6월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광수는 '매일신보'에 연재하던 <무정>을 6월 중순에 끝낸 뒤, 신문사 요청에 따라 <오도(五道) 답파 여행>이라는 기행문 연재를 6월 말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 다섯 도의 각지를 직접 다니며 쓴 여행기 중 제5신(信)부터 제8신까지가 부여에 관한 내용인데, 부여에 머문 6월 말 나흘 동안 이광수가 <낙화암> 가사를 썼을 가능성이 높다. '매일신보' 연재문에는 <낙화암> 가사가 보이지 않지만, 그 연재문을 조금 줄여서 거의 그대로 옮긴 <삼천리>의 <아아 낙화암>에 가사가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추정이 무리는 아닌 듯하다.
<오도 답파 여행>을 마무리한 이광수는 9월에 와세다대학 학업을 위해 도쿄로 돌아갔고, 이후 1921년 봄에 아주 귀국할 때까지 서울, 베이징, 도쿄, 상하이 등 여러 곳을 오가며 지냈다. 그런 와중에 <낙화암> 가사가 야나다 타다시의 곡과 만나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보이나,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은 알기 어렵다. 곡이 만들어진 때가 1911년쯤이니, 1910년대 후반에 어떤 경로로든 이광수가 그것을 듣고 알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사자수 나린 물에 석양이 빗길 제 버들꽃 날리는 데 낙화암이란다 모르는 아해들은 피리만 불건만 맘 있는 나그네의 창자를 끊노라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
- <낙화암> 음반 가사지에 실린 노래 제1절
가사와 곡조를 연결한 이가 이광수 본인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누구인지도 실은 정확히 알 수 없긴 하다. 그래도 분명하고 또 중요한 점은, 1920년대 이후 오랫동안 노래 <낙화암>이 대중을 매혹하고 한세상을 풍미했다는 사실이다. 백 년 세월이 지나면서 정취는 옅어지고 기억은 흐려졌지만, 다양한 기록으로 남은 노래를 들을 때면 지금도 그렇게 심금(心琴)이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