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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영화거장이 남긴 최후의 시나리오
<환등기>
잉마르 베리만 지음, 신견식 옮김
민음사
380쪽
3만 원
잉마르 베리만 지음, 신견식 옮김
민음사
380쪽
3만 원
스웨덴의 작은 섬 포뢰에서 쓰인 책은 베리만의 ‘허세로 시작한 자아 해명서’라 할만하다. 여느 자서전처럼 어린 시절부터 생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선입선출식으로 기억을 나열한 글이 아니다. 한 거장이 필모그래피를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써 내려간 시나리오에 본질적으로 더 가깝다. 단지 기억을 기술한 게 아니라, 삶을 하나의 서사로 연출했다는 뜻이다. 책을 펼치는 순간 직감적으로 느껴진다. ‘피가 흐르고 잉마르는 핏기 없이 웃음 짓는다. 현실. 그리고 시네마토그래프가 왔다’처럼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가는 글을 읽으면서다. 보르헤스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같은 작가들의 ‘마술적 사실주의’식 소설을 연상케 하는 자서전이 또 있을까. 애당초 자서전 이름부터가 상징적이다. 전근대 마술사들이 애용했던 환등기는 강렬한 빛을 쏴 이미지를 비춰내는 원시적 슬라이드 영사기로, 인류를 영화라는 환상의 세계로 안내한 첫 매개체다.
환등기는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의 기원이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했던 어린 시절 베리만이 난생처음 영화관에서 가서 본 “결코 사라지지 않을 열병에 걸리게 한” 시네마토그래프와 함께 자신의 분노와 희망, 꿈을 토해낼 수 있는 안식처였다.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대표작 ‘화니와 알렉산더’(1982)에서 성탄절 파티를 마친 후 어린 알렉산더가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을 발하는 환등기에 마음을 빼앗기는 장면이 떠오른다. 베리만의 영화 상당수에 자전적 요소(‘결혼의 풍경’)가 깔려 있고, 현실과 환상이 쉼 없이 교차하는 연출(‘산딸기’)이 반복되는 것을 고려하면 <환등기>라 이름 붙인 책이 자서전의 탈을 쓴 시나리오라는 점은 보다 분명해진다.
극장의 위기라지만 위대한 감독들이 남긴 예술영화는 오히려 각광받는다. 장뤼크 고다르, 마틴 스코세이지, 데이비드 린치, 라스 폰 트리에보다 앞서 영화라는 꿈을 좇았던 옛 거장을 활자로 만나보는 건 어떨까. 허세로 출발했지만 과장된 자기만족에 그치지 않고 구구절절 촬영물을 편집하듯 삶을 잘라내고 이어 붙여 완성한 시나리오의 연출은 완벽하다.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