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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김창열·박서보·이우환…거장들의 20년 '비밀 편지' 최초 공개
[2025 뉴욕 아트위크를 가다]
첼시의 티나킴갤러리서 <한국 현대미술의 형성> 전시
김창열·박서보·이우환·김환기의 1961~1982년 편지 등 공개
70~80년대 주요 작품 그룹전 통해 "단색화 뿌리" 재조명
서울의 박서보 구심점으로 치열했던 한국 미술의 세계화
뉴욕의 김환기, 파리의 김창열, 도쿄의 이우환 등
독자적 작품 구축하며 세계 무대 진출 도모하고 이끈 과정
4년간 작가와 유족 등 찾아다니며 '박물관급' 아카이브
뉴욕서 동명의 영문책으로 발간해 세계 미술계 화제
첼시의 티나킴갤러리서 <한국 현대미술의 형성> 전시
김창열·박서보·이우환·김환기의 1961~1982년 편지 등 공개
70~80년대 주요 작품 그룹전 통해 "단색화 뿌리" 재조명
서울의 박서보 구심점으로 치열했던 한국 미술의 세계화
뉴욕의 김환기, 파리의 김창열, 도쿄의 이우환 등
독자적 작품 구축하며 세계 무대 진출 도모하고 이끈 과정
4년간 작가와 유족 등 찾아다니며 '박물관급' 아카이브
뉴욕서 동명의 영문책으로 발간해 세계 미술계 화제
네 명의 예술가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한국의 후기 근대 및 현대 화가들이다. 이들의 작품 세계는 서로 달랐지만, 참혹한 시대를 건너온 삶의 궤적은 닮았다. 1950년대 초 6·25전쟁의 여파는 총체적 위기를 가져왔다. 집단적 트라우마와 존재론적 불안에 시달리는 건 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민했다. 예술로서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한국적 정서와 시대 정신에 맞는 새로운 현대성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그 해답 중 하나는 추상이었다.
한국 추상을 대표하는 김환기는 달항아리, 매화 등 전통 소재와 자연 풍경으로 작업하다 미국 뉴욕 체류 시기 화면 전체를 점으로 채워 나가는 ‘전면 점화’로 나아갔다. 박서보와 김창열은 행위 중심의 추상으로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했다. 김창열은 도교적 무아의 사유를 반영한 ‘물방울 연작’ 등으로, 박서보는 절제와 반복을 기반으로 한 ‘묘법 연작’으로 수행의 예술을 극대화했다. 일본 ‘모노하 운동’을 이끈 이우환은 1970년대 초부터 절제된 붓질과 긴장감을 결합한 작업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조형 언어를 만들었다.
독창적인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이들이, 해외여행은 물론 국가 간 통신조차 쉽지 않았던 1960~1970년대를 넘어 수십 년간 끈끈한 소통을 이어왔다는 건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하지만 정말 그랬다. 김창열과 박서보, 이우환 그리고 김환기는 20년 넘는 세월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계 무대에 한국 미술을 알리기 위해 해외 작가와 예술계의 동향 등 정보를 건넸고, 화랑과 비엔날레 등에 서로를 소개했다.
"박 선생님, 인도 비엔날레 불참가라니 섭섭합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네 명의 거장이 어떻게 힘을 합쳐 전쟁 후 혼란과 재건의 시기를 딛고 섰는지는 그동안 가족들조차 어렴풋하게 알았을 뿐이다. 지금이야 김환기, 박서보, 김창열, 이우환의 작품이 세계 경매 시장에서 수십억원에 팔리고, 주요 미술관과 박물관이 소장하는 등 높은 지위를 얻었지만 이건 불과 10년 안팎의 일이다. 예술가가 주고받은 편지에는 시대의 고뇌와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성, 그 접점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김창열, 김환기, 이우환, 박서보는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었음에도 수십 년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으며 긴밀한 유대와 지적 교류를 이어갔다. 문화 인프라가 미비하던 시기, 이들의 서신은 세계 미술의 동향을 논의하고 전시를 기획하는 실질적인 협업의 수단이자 연대의 도구였다. 오직 손으로 새겨 쓴 편지들을 통해 1961년 파리비엔날레 등 세계 무대에 진출했고, 상파울루-뉴욕-서울-파리-도쿄를 오가며 전시회를 열고 각국의 화랑과 비평가들을 연결했다.
박서보는 네 명의 예술가들 중심에 있었다. 김창열과는 1950년대부터 끈끈한 우정을 이어왔다. 넷 중 유일하게 한국에 머무른 작가이기도 하다. 박서보와 김창열은 각각 홍익대와 서울대에서 김환기에게 그림을 배웠다. 전쟁으로 학업이 중단되고, 이후 혼란의 시기를 거치면서도 박서보는 국경을 넘어 진취적인 한국 작가들을 한데 모으는 구심점이 됐다. 서울을 기반으로 동료와 자신의 작품을 세계 각 도시에 보내 전시하고 교류하는 데 가장 열정적이던 인물이다.
1957년 박서보는 김창열과 함께 저항적인 젊은 작가들을 모아 ‘제2회 현대미술가협회전’ 개최를 주도했고, 1961년 파리비엔날레에 한국이 참여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았다. 박서보는 누구보다 일찍이 해외로 눈을 돌린 작가이기도 했다. 박서보가 1961년 파리비엔날레에 초청받아 몇 달간 머문 시기, 그는 새로운 예술 세계에 눈 떴다. 이후 더 적극적으로 해외 비엔날레에 한국 작가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65년 미국을 거쳐 1969년 파리에 정착한 김창열과는 이후 1980년대를 넘어 타계 직전까지 진한 우정으로 이어졌다. 혈연관계보다 더 진했던 우정, 그것을 넘어선 예술에 대한 열정이 그들을 단단히 연결했다.
1961년 파리비엔날레 참가 이후 김창열은 1965년 서울에서 뉴욕으로 건너갔다. 1963년 브라질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작가이자 커미셔너로 참여한 스승 김환기의 권유가 결정적 계기였다. 당시 마크 로스코의 작품 등에서 영감을 받아 한국적 요소 대신 점화로 옮겨간 김환기는 김창열의 멘토로 뉴욕 이주를 격려했다. 당시 뉴욕은 팝아트, 비디오 아트, 개념미술, 미니멀리즘 등 아방가르드 운동이 활발하던 때. 김창열도 뉴욕 예술계의 움직임을 흡수하며 그림과 조각, 다양한 매체 실험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울한 심경을 박서보에게 편지로 털어놨다.
“뉴욕은 잔혹한 도시다. 건물들이 너무 높아서 사람이 살도록 설계된 것 같지 않다. 유령과 악령이 사는 절벽이나 창고처럼 보인다.”(1966년 편지 중)
결국 김창열은 1969년 파리로 이주했고, 경제적 어려움 탓에 마구간에 거주하며 ‘물방울’이라는 그만의 언어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녹록지 않은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김창열과 박서보의 편지 속에는 치열한 고민들이 엿보인다.
“박선생님이 인도 트리엔날레에 불참가라니 섭섭하기 짝이 없습니다. 나란히 내어서 보이는 기회도 드물 터인데, 항상 박선생님은 너무나 자기를 죽이고 남 일만 생각하시는 감이 들어도, 인제는 나이도 나이인데 제발 체면채리는 것은 그만둡시다. 김구림 씨는 퍽 고생이 많으나 누구보다도 알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힘이 부족해서 여기 대학에라도 적을 두게 해보려 했으나 잘 안되었습니다. 각 국제적인 잡지에 우리나라 현대미술을 소개해주도록 저 나름대로는 쌓아 놓겠으니 서울 가며는 여러 군데 안내 부탁합니다. 서세옥 선생께도 안부 여쭈어 주시기 바랍니다.”(1974년 11월 5일 이우환이 박서보에게 보낸 편지 중)
“도쿄, 베니스, 상파울루를 비롯한 많은 비엔날레가 매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그 목적조차 불분명해지고 있습니다. 현재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전시 중인 한국 작가들을 대규모로 소개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자 좋은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환기, 백남준, 김봉태, 이응노, 김창열, 이성자, 곽인식, 곽덕준 그리고 저와 같은 작가들을 비롯해 해외에서 호평을 받은 한두 명의 작가들을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뉴욕=김보라 기자
1950~60년대 필담으로 세계 미술 시장의 동향과 한국 미술의 갈 길을 고민하던 네 명의 화가는 1970년대에 이르러 각자의 작품 세계를 독창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 작품들이 이번 전시에 걸려있다. 아래 네 명의 화가가 1970년대에 그린 작품들을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