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읽기 ▶▶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예술이다]

예술은 예술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된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발생한다

'국가란, 그렇다면 과연 무엇인가'란 질문과 함께 생각해야 하는 우리 시대의 풍경은, 기존의 상상적 동질성이 포섭하지 못했던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이질성의 여러 화해 불가능한 영역과 욕망이 다양하게 표출되는 현상이며, 그래서 우리 시대의 예술이 가장 적극적이며 전투적으로 포착하여 표출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러한 이질성의 풍경들이다.

그 이질성의 어두운 구멍은 이미 활짝 열렸다. 그러나 그것이 어둠이라고 해서 그저 빛으로 그 그림자를 모두 몰아낼 수 없음은 자명하다. 고귀한 것은 드물고도 지난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드물고 고귀한 것은 헤프고 남루한 것 위에 놓여 있고,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구분 같은 것도 없이 서로를 미학­정치적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기반하고 있다. 하여 한 번 더, 저 주권적(souverain) 힘이 어떻게 가능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헌법의 예외 없는 적용이라는 법치주의의 이상이 이상적으로 실패했음을 현실적으로 인정함을 넘어 아예 그 현실적 문제점들까지 실정적으로 포기했음을 천명할 때 열리는 것은, 지금껏 우리가 애써 어렵사리 외면해 왔던 우리의 민주공화국 체제에 엄연히 존재하는 실재의 구멍 그 자체, 곧 또 다른 지상적 지옥의 문이다.

어쩌면 그 지옥의 문은 이미 열린 지 오래되었다. 이 근원적 예외 상태가 그저 예외가 아닌 아예 일상이 될 때, 주권(souveraineté)을 실행할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주체는 누가 되는가. 그것은 단순히 정치­권력적인 주권뿐만 아니라 내가 내 삶에서 가용하며 심지어 소진하고 탕진마저 할 수 있는 어떤 실존의 힘을 말하고 있다. 이는 곧 예술적 힘에 대해 우리가 요구하는 것, 다시 말해 실존의 미학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힘에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것이 현재 우리의 위기가 우리 자신에게 묻고 있는 질문이다.

그렇기에 여기서 새삼 예술이란 다시 무엇인가. 바로 저 주권성의 암시이자 현시, 그 질문으로서의 표출이자 폭발이다. 예술은 저 정치적 예외 상태가 마치 일상처럼 파놓은 함정 같은 자리, 곧 예술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 같은 곳에서 벗어나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자리에서 발생하는 어떤 힘이다. (범박한 예를 들자면, 제도화되고 시장화되기 전, 키스 해링(Keith Haring)과 뱅크시(Banksy)의 그림이 마치 그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자리에 있지 않았듯이 말이다). 우리가 예술의 안팎에서 새롭게 찾아내야 할 것은 바로 이 자리 아닌 자리, 비장소(non-lieu)의 장소이다.
키스 해링, Pop Shop I(Plate3), Pop Shop, 1987. / 사진출처. masterworksfineart 홈페이지
키스 해링, Pop Shop I(Plate3), Pop Shop, 1987. / 사진출처. masterworksfineart 홈페이지
2020년 2월 영국에서 발견된 뱅크시의 그림. / 사진. ⓒREUTERS
2020년 2월 영국에서 발견된 뱅크시의 그림. / 사진. ⓒREUTERS
예술은 공존의 현실 속에서 절멸의 이상을 의심하며 가장 주권적인 순간을 구출한다

이러한 비­장소의 장소, 기존에 부재하던 자리의 존재를 찾아내는 일은, 주권적인 순간을 구출하는 예술의 책무가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순간 앞에서 ‘저들’(곧, ‘우리’로 상정된 집단과 다른 것으로 상정된 집단)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을 묻는 질문은 그저 속 편한 소리, 동상이몽에 불과하다. 이질적인 것과의 공존은 그저 가능태나 잠재태로 물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분명한 ‘현실’이기 때문이며, 오히려 그러한 현실의 공존과 반대되는 상대편의 절멸이야말로 양측이 품고 있는 절대적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미 현실로 존재하는 ‘공존’의 가능성을 묻는 동어반복에서 벗어나 이 ‘절멸’의 묵시록적 이상이 어떤 우회로와 배출구를 낼 수 있을지를 역설적이고도 도전적으로 묻는 기이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허울 좋은 지붕 아래에서 오히려 가장 절실하게 예속을 원하고 있는 이 반란 앞에서, 그 옆과 뒤에서, 그리고 그 안과 밖에서, 그 광신적 열정 안에 포함되어 있거나 배제된 가장 주권적인 순간을 찾아내 구출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 예술의 책무가 될 것이다.

부서지기 쉬운 역사의 반복 속에서 예술은 희미하게 타오르는 불꽃이다

민주주의란 무엇보다 너무도 부서지기 쉬운(fragile) 취약한 위기의 것, 그럼에도 혹은 그래서 더욱, 소중한(precious) 위기의 것이다. 예술도 정확히 그러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렇게 그 자체로 부서지기 쉽고 소중한 예술이 말하고 노래하고, 그리고 보여주며 증언하려는 것이 또한, 바로 그렇게 부서지기 쉽기에 더욱 소중한 우리 모두라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아름다움을 지키는 일(그러나 이 아름다움이란 단순히 추함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그토록 부서지기 쉽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욱 강하게 그것을 응시하고 키워가며 퍼뜨려가는 일이다(그러나 이는 부서지기 쉬운 것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어떤 강화의 작업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예술은 현 상황에 대한 위로나 힐링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 현실을 환상으로 덮는 저 지독한 위선적 ‘현실성’에 대항해 그 현실 자체의 ‘환상성’에 다른 가능성의 노출과 폭발을 통해 개입할 수 있는 행동, 그것이 바로 예술이 가진 책무의 수행적 정체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에서 헤겔이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할 때 놓친 부분이 그 역사가 첫 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소극으로 반복된다는 사실이었다고 쓴 바 있다. 역사는 그렇게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반복된다. 나는 여기서 마르크스가 잊었던 사실도 하나 있었다고 말해야겠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그것은 세 번이고 네 번이고 계속 반복되며, 처음에는 비극, 다음에는 희극, 또 다음에는 그 희비극의 불꽃으로 반복된다고. 이 불꽃이 배타적 전체주의의 불길이 될지, 그 전체주의의 광풍도 넘고 민주주의의 위기 자체도 넘어 새로운 가능성의 들불이 될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바로 그 ‘아무도’의 아무개들 안에 바로 우리 모두가 있다.

예술의 위기가 아니라 위기의 예술은 그 스스로 프로파간다가 된다

예술은 언제나 위기 안에 있어 왔다. 민주주의가 항상 위기에 있었던 것처럼. 아니, 민주주의 바로 그 자체가 언제나 위기의 형태였던 것처럼. 그래서 ‘위기의 예술’이란 그저 위기에 빠진 예술, 따라서 그 위기로부터 탈출해야 할 당위를 지닌 예술을 의미하지 않는다. 위기의 예술이란, 바로 위기 그 자체인 예술, 언제나 바로 그 위기만을 대상이자 내용이자 형식으로 삼아야 하는 행동으로서의 예술을 뜻한다. 예술 자체의 정의(definition/justice)가 그러하다.

1913년 파리에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초연되었을 때 일어났던 엄청난 열기의 소란과 거부 반응을 현대의 공연장에서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현대의 관객과 청중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예술이 전시되거나 공연된다고 해도 그저 그곳을 혼자서 빠져나오거나 조용히 침묵하며 감내할 뿐, 그에 대해 격렬한 반대의 반응을 표출하는 것을 예술적 무례이자 무지로 여기는 제도 안에 너무도 깊이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격렬한 반대의 힘을 잃은 예술의 제도, 이를 예술적 관행과 예의의 바람직한 안착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거세된 예술적 열정의 관습적 고착과 무기력으로 여겨야 할까.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미학적 원칙을 위해 그에 반대되는 것과 싸울 수 있는 열정을 박탈당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미학적 원칙이라는 것 자체가 부재하는 상황 속에서 살아 있는 듯 죽어 있다. 이것이 진정 예술의 발전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예술의 퇴행을 가리키고 있는지, 우리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흔히들 예술은 프로파간다(propaganda)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예술은 프로파간다에 ‘이용’되어서도 안 되고 ‘함몰’되어서도 안 되며 그것으로 ‘축소’되거나 ‘환원’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가 항상 놓치고 있는 중요한 사실, 근본적 사태가 있다. 예술은 그 본성상 태생부터 하나의 프로파간다로서의 표현이었다. 예술과 다른 무언가를 홍보하거나 세뇌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바로 예술 그 자체가 예술을 통해 전달하려는 의지의 프로파간다였던 것이고, 이는 현재에도 그러하며 또 그래야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바로 그 예술 자신으로 프로파간다가 되어야 하며, 그러한 프로파간다로서의 예술만이 위기를 온전히 자신의 인식론이자 존재론으로 받아들여 그 위기를 오롯이 위기로서/써 돌파하는 윤리이자 정치가 될 수 있다. 여기서 미학은 정치와 따로 존재하여 그 위나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정치가 기대고 있는 지반이 바로 우리의 미학 자체이다. 그래서 예술은 그 자체로 하나의 프로파간다, 곧 그 자체로 하나의 개입이자 행동이다. 예술이 바로 지금 여기에 그 ‘위기’ 자체로 호출되고 소환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람혼 최정우 미학자·음악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