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나 '신 생태계', 2021, 수집된 플라스틱과 단채널 비디오 등.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장한나 '신 생태계', 2021, 수집된 플라스틱과 단채널 비디오 등.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건 예술가의 책무다. 백남준(1932~2006)이 ‘비디오 아트계의 조지 워싱턴(미국 초대 대통령)’으로 불리는 건, 그가 미술사에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章)을 펼쳤기 때문만은 아니다. 백남준은 1984년 새해 첫날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이용한 동시 송출 텔레비전(TV)쇼를 통해 미국과 뉴욕, 파리, 베를린, 서울을 연결한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매스미디어란 존재를 긍정했다. 바보상자라는 표현으로 TV를 비판하고, 빅브라더가 현실이 됐다는 두려움이 지배하던 당시 TV가 전 세계를 잇는 혁신의 시발점이 될 거란 화두를 던진 것. 그 예측대로 바보상자는 스마트폰으로 진화해 전 세계인의 거리를 좁혔다.
백남준이 기획해 1984년 선보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 뉴욕과 파리의 사회자가 대화하는 모습. /한경DB
백남준이 기획해 1984년 선보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 뉴욕과 파리의 사회자가 대화하는 모습. /한경DB
인공지능(AI), 양자역학 등 개개인의 지성으론 따라잡기 힘들 만큼 기술의 발전이 빨라진 시기에 예술가들은 어떤 비전을 제시해야 할까. 경기 용인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 4.0’은 바로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 전시다. ‘랜덤 액세스’는 1963년 백남준이 첫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의 이름. 백남준은 이 작품을 소개한 당시 전시 포스터에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가 던진 질문 “Que sais-je?(나는 무엇을 아는가)”을 적었다. 요약하자면 이번 전시는 앎에 대해 반문하고, 끊임없이 이해를 넓히려 했던 백남준처럼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려는 동시대 젊은 예술가들의 실험을 보여주는 시도인 것이다.

전시에는 고요손, 김호남, 사룻 수파수티벡(태국), 얀투(일본) 장한나, 정혜선·육성민, 한우리 등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7팀(8명)의 젊은 예술가들이 만든 작품 14점이 나왔다. 백남준아트센터 특유의 색깔답게 비디오와 조각, 설치 등으로 구성됐다. 백남준아트센터 측은 “우리가 규정해 놓은 사고방식과 관행에 의문을 제기한다”며 “인간과 자연, 기술과의 공존을 모색하거나 예술의 형식과 의미를 확장하는 실험도 있다”고 설명했다.
백남준아트센터에 전시된 얀투의 '진행 중인 설치'(2022)의 모습. /유승목 기자
백남준아트센터에 전시된 얀투의 '진행 중인 설치'(2022)의 모습. /유승목 기자
1988년생 장한나 작가의 ’신 생태계‘는 사고를 지배하는 인식을 비튼다는 면에서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과 결이 비슷하다. 장한나는 2017년부터 강원도 고성부터 포항까지 동해안에서 직접 수집한 암석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 흥미로운 건 ‘뉴 락(새로운 암석)’이라 직접 이름 붙인 이 암석이 자연 속에서 돌처럼 변한 플라스틱이라는 것. 인간이 만든 인공물질인 플라스틱은 버려지는 순간 자연과 섞일 수 없는 쓰레기가 된다는 기존의 인식과 달리, 작품은 뉴 락이 바닷가 동식물의 서식지로 바뀐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는 “자연의 사전적 정의는 ‘인간의 손이 더해지지 않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뉴 락’은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진다”면서 “대척점에 있는 자연과 인공 플라스틱이 하나가 되는 모습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일본 작가 얀투가 선보인 ‘진행 중인 설치’도 눈길을 끈다. 전시장 한복판에 세워진 철제 캐비닛엔 청소기부터 쿠팡 로켓배송이 적힌 박스, 석고상, 백남준이 1984년 선보인 오브제 작품 ‘컬러 의자, 흑백 의자’가 함께 올려져 있다. 이 주위에는 물류센터에서 볼 법한 자동운반차량(AGV)가 움직이며 물건들을 옮긴다. 이 일련의 광경은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란 의문을 던지는 것 같다. AGV 로봇이 ‘예술품’과 ‘예술품이 아닌 것’을 나누는 인간적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대상을 동등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이 허상인 것인지, 아니면 AI로 대표되는 고도의 기술적 판단에도 허점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정혜선·육성민, '필라코뮤니타스', 2022.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정혜선·육성민, '필라코뮤니타스', 2022.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대부분의 설치나 미디어 작품들이 그렇듯, 전시에 나온 작품들도 기술적인 측면에서 완벽하거나 고도의 과학적 지식이 담긴 것은 아니다. 다소 조악하고 어설픈 점도 더러 있다. 작가들이 과학자나 엔지니어는 아니기 때문. 틀에 얽매이지 않는 예술적 사유에서 비롯된 현대 문명의 이면과 잠재된 가치를 유추해보는 게 전시의 포인트다. 백남준아트센터 관계자는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와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촉발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전시는 6월 29일까지.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