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전경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전경
조선소 현장에 출입 관리용으로 설치한 안면인식기를 무단으로 철거한 HD현대중공업 노동조합 간부들이 무더기로 고소당했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인식기 설치가 근로자를 감시·통제하려는 술책이므로 발견되는 족족 철거하겠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반면 현대중공업과 협력업체는 인건비 허위 청구 방지와 보안 관리를 위해 인식기 설치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안면인식기 무단 철거...'실력행사' 나선 노조

17일 HD현대중공업 하청지회 등에 따르면 HD현대중공업 사내협력사들은 올해 2월부터 원청인 현대중공업의 지원을 받아 울산조선소 작업 현장에 안면인식기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협력업체 근로자들의 출퇴근과 보안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결근했으면서도 출근한 것처럼 꾸며 임금을 타가거나 퇴직근로자 출입증을 타인에게 대여하는 등 보안 문제가 발생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는 게 회사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현대중공업도 협력사에 인식기 설치를 권장하고 있다. 협력업체 출입관리가 제대로 안되면 협력업체가 원청인 현대중공업에 청구하는 인건비가 과다 계산되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은 ‘조선업 원·하청 상생협약’을 통해 지난 2월부터 도입을 추진 중인 ‘에스크로 제도’를 확산하기 위해서도 철저한 출입 관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에스크로 제도는 원청이 특수 계좌에 인건비를 입금하고 하청업체가 근로자에게 임금을 제대로 지급한 게 확인된 후 계좌에서 인건비 인출을 승인하는 일종의 임금체불 방지 장치다.

사내협력사들로 이뤄진 ‘사내협력회사협의회’도 지난 12일 입장문을 통해 “정부 일자리 지원 사업도 출석 일수를 요구하는 만큼 신원 확인이 필수”라며 인식기 도입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협력업체 노조들은 안면인식기가 근로자 감시·통제 수단이 될 것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는 15일 노조 소식지를 통해 “노동자의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발상”이라며 “도입계획을 전면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지난 5일과 8일에는 사내협력업체와 특수선 작업 현장에 설치된 인식기를 직접 철거하는 등 이달만 스무 곳이 넘는 현장에서 실력 행사에 나섰다. 지난 2월에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인식기 설치가 ‘인권침해’라며 진정을 냈다. 노조는 “인원 확인은 정문 집계, 식사 카드 확인, 일일 작업지시서 등 기존 방식으로 충분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수기 근무기록·지문인식에 불신 높은 기업들

협력업체들은 개인정보 수집·이용 및 제3자 제공 동의서를 근로자들로부터 받아냈기 때문에 인식기 설치에 법적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노조의 무단 철거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관련자들을 고소했다. 협력사 관계자는 “신원이 확인된 간부 7명을 고소 조치했으며 신원이 추가 확인되는 대로 추가 고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협력업체들은 노조가 인식기 훼손 행위를 중단하지 않을 경우 인사 조치하겠다는 공문도 발송했다.

안면인식기 등 첨단 출입관리 시스템을 도입한 배경에는 기존 수기식 근무 관리나 지문 인식기 등에 대한 기업들의 불신이 있다. 지문 인식기를 통한 출입관리도 일부 근로자들의 꼼수에 뚫린 지 오래다. 실제로 지난 2022년에는 동료들에게 지문인식기 등록을 대신 부탁하거나 지문만 인식하고 자리를 뜨는 등 부정한 방법으로 허위 수당을 타간 지방 공무원 111명이 무더기로 적발됐다.

이러다 보니 전국 각지에 현장 사무실을 운영하거나 사업장이 넓어 출결 관리 어려운 건설 현장 등을 중심으로 출입 조작이 어려운 안면인식기 도입이 활발한 상황이다. 다만 민감한 생체정보인만큼 근로자들의 사전 동의 없이는 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인권위도 지난 2022년 국공립 어린이집 직원들에 대한 안면인식기를 이용한 출입관리가 개인정보자기결정권 침해라는 판단을 내린 바 있다. 김용문 덴톤스리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안면인식기 등 회사의 개인정보·생체정보 취득을 둘러싼 노사 갈등은 늘어날 전망”이라고 밝혔다.

이광식 기자 bume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