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석 칼럼] 끈적한 물가와 끈질긴 풍선
정부는 지난 9월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의약품 가운데 7600여 개를 골라 약값을 최대 27% 인하했다. 가계 부담을 줄이고, 덤으로 물가 상승 압력도 낮추자는 취지였다. 일부 제약사의 매출이 10% 이상 감소할 수 있다는 우려는 사뿐히 무시됐다. 두 달여 웅크리고 있던 제약사들은 지난달 조용히 반격에 나섰다. 동화약품은 간판 제품인 감기약 판콜과 상처치료제 후시딘의 도매 공급가격을 10%씩 올렸다. 두 가지 모두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않는 일반의약품이다. 눈치를 보던 다른 회사들도 하나둘 인상 대열에 동참하는 분위기다. 전문의약품을 눌렀더니 일반의약품 가격이 오르는 ‘풍선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권력의 손은 늘 근질거린다. 물가가 오르든, 사회 기강이 문란해지든 가만히 보고 있지 못한다. ‘자연 치유’가 최선책임에도 꼭 소매를 걷어붙여야 직성이 풀린다. 동서고금 공통된 속성이다. 18세기 현해탄 건너 일본 에도 막부도 마찬가지였다. 사치 풍조를 근절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겠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의 옷 색깔까지 건드리고 나섰다. 염색용 작물이 늘어나면서 식량작물 재배 면적이 줄어들고 있다는 경제적 판단도 한몫했다. 규제는 화끈했다. 의복의 색깔을 쥐색, 차(茶)색, 남색 딱 세 가지로 제한했다. 잠깐 웅크렸던 시장은 곧 탈출구를 찾았다. 화려한 옷에 대한 욕구를 억누르지 못한 것이다. 차색 비스무리한 색깔옷이 수십 종, 쥐색류 옷감이 수백 종으로 불어났다. 권력의 눈길은 피하면서 패션에 대한 갈망은 충족시킨 것이다. 힘 가진 자들의 물정 모르는 판단은 ‘사십팔차백서(四十八茶百鼠)’라는 신조어까지 낳았다. 48가지 차색, 100가지 쥐색이라는 뜻이다. 일본판 ‘풍선’은 이렇게 알록달록 본분을 다했다.

요즘이라고 다를 리 없다. 한국이라고 ‘용가리 통뼈’는 아니다. 정부가 물가 관리에 나서자 오렌지 주스는 단박에 싱거워졌고, 튀김닭은 다이어트를 시작했으며 감자칩은 감자 대신 질소를 품고 빵빵해졌다. 인플레이션이 슈링크플레이션(용량은 줄이고 가격은 유지)과 스킴플레이션(질은 떨어뜨리고 가격은 유지)이라는 변종을 낳은 배경이다.

그럼에도 정부의 ‘물가 통제 열차’는 여전히 칙칙폭폭이다. 지난달엔 ‘물가 관리 책임 실명제’까지 꺼내 들었다. 부처별로 품목을 정해 물가 잡기에 나서겠다는 취지다. ‘빵 사무관’ ‘고추 서기관’의 부활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12년 이후 10여 년 만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슈링크플레이션과의 전쟁도 선포했다. 별도의 신고센터도 설치하기로 했다.

‘민생 안정’이라는 명분에는 이견을 달기 어렵다. 높은 곳에 끈적하게 눌어붙은 물가는 어떻게든 끌어내려야 한다. 고물가 와중에 사욕을 채우는 기업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실효성이 있느냐는 것. 역사적 경험은 “글쎄요”에 가깝다. ‘상유정책 하유대책(上有政策 下有對策)’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무슨 정책을 뽑아내든 시장은 반드시 제 살길(대책)을 찾아낸다.

기업을 때리는 방망이보다는 통화량부터 줄이는 정공법이 효과적이다. 불필요한 재정 지출을 줄이고, 금리를 적정 수준으로 올리는 게 정답에 가깝다. 규제를 줄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도 필요하다. 맹점은 이 모든 게 정치적으로는 불리하다는 것. 여야 의원에겐 언제나 ‘건전 재정’과 ‘가계부채 축소’보다 ‘선심 정책’과 ‘대출금리 인하’가 달콤하다. 손쉬운 길을 가면 종착역은 뻔하다. 포퓰리즘 정책을 거듭한 탓에 여전히 세 자릿수 물가상승률에 신음 중인 아르헨티나 근처 어딘가일 것이다.

안재석 한국경제TV 뉴스콘텐츠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