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봉의 논점과 관점] 이태원 참사 다큐와 음모론자들
이태원 해밀턴호텔 옆으로 꽃다발과 촛불이 놓인 골목길을 지나쳐 갈 때면 아직도 가슴이 내려앉는다. 낮에도 컴컴해 뵈는 저 좁디좁은 길 위에서 1년 전 159명이 압사했다. 행인들이 추모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기도하고 흐느끼거나 또는 무거운 표정으로 침묵한다. 누군가는 사회를, 누군가는 정부를 지탄하기도 한다. 새삼 느끼지만 1년으로 치유될 상처가 아니다. 과거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세월호가 그랬듯 이 트라우마도 한참 동안 사회를 짓누를 것이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재난을 정치화하는 무리들

중요한 것은 참사를 직시하는 것이다. 애써 의미를 깎아내지도 말고 덧대지도 말아야 한다. 시간을 들여서라도 오로지 재난만 직시해 책임을 가리고, 재발을 막고, 피해자와 유족을 위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매번 무언가에 휘둘렸다. 재난이 터지면 야권은 정권을 단죄한다며 달려들었다. 친야 성향의 커뮤니티와 SNS에선 온갖 의혹이 무분별하게 제기됐다. 정부의 모든 행동은 ‘은폐’와 ‘조작’으로 간주되고 곧이어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커졌다. 그럴 때마다 정부 부처는 그저 면피하기 급급했고 여권에선 재난의 의미를 애써 평가절하했다. 그러다 각종 조사위원회가 꾸려지고 시민단체와 노동계 인사들로 채워졌다. 전 세계에서 한국에만 있는 ‘K 재난처리’ 방식이다.

세월호가 그랬다. 9년간 수백억원의 예산을 들여 진상 조사를 벌였지만 제대로 건진 게 없었고 사회적 갈등만 더 키웠다. 이제 이태원 참사도 그럴 조짐이다. 과거 대형 참사 때마다 정치 프레임을 씌워온 자들과 음모론자들을 제대로 막지 못한 원죄다.

최근 미국의 온라인동영상 서비스(OTT)인 파라마운트 플러스가 이태원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크러시(Crush)’를 공개했다. 이 다큐멘터리의 지식재산권과 편성 권한을 가진 제작사 CBS는 애초부터 미국에만 방송을 내보내기로 했다. 특정 국가의 재난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해외에 송출하는 게 부담스러웠던 영향으로 해석된다. 미국 외 국가에선 본편은 물론 예고편도 볼 수 없다.

그러자 음모론자들이 이때다 싶어 들고 일어났다. 친야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한국에서만 크러시를 볼 수 없다” “정부가 이태원 참사 다큐를 막았다”는 허위 주장이 쏟아졌다. 일부 유튜브 채널은 이 예고편을 무단 복제한 뒤 “전 국민이 봐야 한다”며 조회수 장사를 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지난 22일 페이스북에 이 무단 복제 영상을 공유하면서 “한국에서 차단 상태. 그러나 많이 보고 널리 알립시다!”라고 적었다. 전직 법무부 장관이 불법 시청을 독려한 셈이다.

또 불거진 맥락 없는 음모론

그 와중에 더불어민주당까지 나섰다. 임오경 원내대변인이 같은 날 “정부 대응의 총체적 문제를 분석한 다큐를 한국에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정부가 직접 확인하고 국민에게 공개하라”고 촉구했다. ‘한국에서만 볼 수 없다’는 팩트도 틀렸을뿐더러 미국 민간 방송사의 프로그램 방영 방침을 왜 한국 정부가 나서 확인하라고 하는 건지 당최 이해하기 어렵다. CBS가 우리 정부 압박에 전 세계 개봉을 금지했다는 얘기인가. 이들은 또 얼마 동안 이태원 참사를 ‘재난의 정치화’를 위한 도구로 활용할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