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디지털 권리장전의 그림자
“어렵죠. 기술이 아니라 법과 제도 때문이에요.”

한 정보기술(IT)업계 최고경영자(CEO)에게 “10년이 지나면 자율주행차가 상용화되느냐”고 묻자 돌아온 답이다.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정교해지겠지만, 사고 책임 소재, 안전 가이드라인 등을 정하는 건 쉽지 않다는 설명이었다.

새로운 기술이 법과 제도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는 과정은 지난하다. 정부와 국회가 내용을 파악하고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일시적으로 법 적용을 유예하는 ‘규제 샌드박스’가 등장한 것도 기술의 제도화가 느려서다. 신기술을 개발하고 플랫폼을 만드는 기업에 얼마만큼의 책임을 지울지도 쉽게 결정하기 힘들다. 무거운 짐을 지울수록 기술 발전 속도가 더뎌지기 마련이다.

IT업계에선 '규제장전' 우려

정부는 지난 25일 ‘디지털 권리장전’을 선보였다. 생성 인공지능(AI)과 관련한 정책과 제도 등을 만들기에 앞서 디지털 시대에 지켜야 할 기준을 담은 ‘헌법’ 성격의 규범을 정한 것이다. 모두가 정의롭고 공정하게 혜택을 향유하는 ‘디지털 공동 번영 사회’를 구현하는 게 디지털 권리장전의 목표다. 벌써 업계에선 이 규범이 ‘디지털 규제장전’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가짜뉴스와 디지털 정보 격차 해소 등의 현안을 기업 규제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할 것이란 하소연이다. 디지털 기술과 관련한 법과 제도의 정비는 AI 시대를 맞아 꼭 필요한 일이라는 데 동감하지만, 국내 IT업계에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아직 구체적인 세부 방향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업계가 바짝 긴장한 것은 정부의 최근 행적이 심상치 않아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온라인 플랫폼을 겨냥한 독과점 관련 규제를 준비 중이다. 공정거래법을 개정해 플랫폼 업체에 대한 규제를 추가하는 방안이 유력하다. 방송통신위원회도 이동관 위원장 취임 이후 통신 요금 인하, 가짜뉴스 단속 등에 속도를 내고 있다.

'우물 안 호랑이'는 곤란

정부의 이런 움직임은 자국 기업 지키기에 적극적인 다른 나라들과 대조적이다. 미국은 최근 국회에 발의된 빅테크 규제 법안 6개 중 5개를 폐기했다. 틱톡을 필두로 한 중국 플랫폼이 세력을 확장하자 ‘규제’에서 ‘지원’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중국도 AI 기술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자국 기업 키우기에 열중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챗GPT 형태의 생성 AI를 개발하는 곳은 바이두, 알리바바 등 12개사에 달한다.

디지털 권리장전에서 출발한 법과 제도를 글로벌 빅테크에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규제 수위를 높였다가 통상 문제로 비화할 수 있어서다. 메타는 최근 1년 사이 앱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수집해 두 차례 과징금을 물었지만, 여전히 제도 개선에 나서지 않고 있다. 소액의 과징금 외에는 이렇다 할 불이익이 없다는 점을 감안한 배짱 경영이다. 구글, 애플 등의 앱 마켓 사업자가 인앱결제를 강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마련된 ‘구글 갑질방지법’도 이렇다 할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모습이다.

디지털 권리장전 제정은 분명 의미 있는 행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정부가 자국 기업에만 엄정한 규제를 양산하는 ‘우물 안 호랑이’가 되는 것은 아닌지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