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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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등 노조의 재정 투명성을 강화하기로 했다. 노조의 재정 정보를 상세히 들여다보고, 국민에게도 필요한 내용을 공개하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깜깜이 회계’로 비판받아온 노조 재정 운용에 메스를 들이대고 나선 모습이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18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고위당정협의회에서 “노조 활동에 햇빛을 제대로 비춰 국민이 알 수 있게 해야 한다”며 “노조 재정 운용의 투명성 등 국민이 알아야 할 부분을 정부도 과감성 있게 적극적으로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총리는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미래 사회 대응 역량을 제고할 수 있도록 노동시장 개혁을 국회 및 당과 협의해 적극 추진하겠다”고 덧붙였다.

현행 노동조합법상으로는 외부에서 노조의 재정 상황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회계 감사를 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이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노조법에서는 조합원이나 행정관청이 노조의 회계 ‘결산’ 결과에 대한 자료 열람을 청구할 수 있을 뿐이다. 회계 감사를 하거나 회계장부 등 자료를 청구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 자료 열람 청구권조차 활용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노조 내부에서도 소수 조합원 등이 회계 투명성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수단이 미약하다는 지적이 계속 제기돼 왔다. 고용노동부 출신인 한 법률 전문가는 “노조 소수파 등이 노조 간부들의 횡령·배임을 제보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지만 고용부 등 정부 차원에서 외부 감사 등을 통해 증거를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행정관청이 노조의 회계 투명성을 들여다볼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면 노정 관계에 큰 변화가 올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고용부 관계자는 “국고 지원이 들어가는 부분부터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착복이나 횡령, 유용·전용 사실이 발견되면 당연히 노조 간부의 형사처벌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조합원 100만명 넘는데…회비·사용내역 '비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홈페이지에 공개한 조합원 수는 2019년 4월 기준 총 101만5000명이다. 민주노총이 이들로부터 거둬들인 회비의 정확한 규모는 철저히 비공개다.

노동계에 따르면 민주노총은 정규직 노동자에게는 1인당 월 1450원, 비정규직 노동자 1250원, 최저임금 노동자에겐 860원의 조합비를 걷는다. 이렇게 거둔 회비에 대해 상·하반기에 내부 감사를 받는데, 감사위원은 민주노총 내부 절차를 거쳐 선임한다.

예산 수입이 철저히 비공개 정보로 다뤄지다 보니 노조의 지출 규모 역시 정확한 정보가 전무하다. 노동계 관계자는 “민주노총 산별노조 중 규모가 큰 금속노조와 공공운수노조는 1년 예산 규모가 각각 300억~400억원인 것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다른 산별 노조를 다 합하면 예산 규모가 1000억원을 웃돌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지난해 기준으로 예산이 144억원이며, 국고보조금으로 연간 약 52억원을 받고 있다.

‘깜깜이 회계’라는 오명을 받는 국내 노조와 달리 해외 주요 선진국은 노조도 투명하게 회계 내역을 공개하고 있다. 미국은 노조가 ‘연차 회계보고서’를 노동부 장관에게 제출해야 한다. 영국에선 노조가 정부 소속 ‘인증관’에게 노조 간부 급여 등 세부 내역이 포함된 ‘연차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

정부 한 관계자는 “현행 노동조합법상 노동조합이 회계감사원을 두게 돼 있는데 이 감사가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며 “회계감사원에 회계사 등 자격 요건을 둔다든가, 일정 규모 이상의 노조는 회계 재정을 공개하게 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여당과 대통령실도 정부의 노동개혁 방침을 거들고 나섰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노동개혁은 경제 도약과 우리나라 청년들의 미래를 위해 절박한 과제”라며 “지금 노동시장 제도 관행은 우리나라 경제와 산업 전반의 족쇄가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은 “노동시장 개혁은 민간 투자 활성화를 위해 필수적”이라며 “지금 노동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경쟁에서 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미래 세대를 위해 인기가 없어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화물연대 파업 사태 이후 노동개혁의 고삐를 죄고 있다. 미래노동시장연구회는 지난 12일 주 52시간 근로제 관리 단위를 ‘1주’에서 최대 ‘1년’으로 늘리고 ‘선택적 근로시간제’의 단위 기간을 확대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권고안을 발표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15일 제1차 국정과제점검회의에서 연금·노동·교육 등 3대 개혁과제를 가리켜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개혁은 인기가 없지만 반드시 해내야 한다”고 의지를 밝혔다.

오는 21일 발표될 내년도 정부 경제정책 방향에서도 노동개혁과 관련한 내용이 대거 담길 것으로 알려졌다.

곽용희/맹진규/정의진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