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 대학도 예외가 아니어서 지난 학기에 이어 비대면 강의가 지속되고 있다. 이제는 모두가 비대면 강의에 익숙해져서 근본적인 어려움은 없지만, 교수와 학생 모두 뭔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을 느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비대면 강의를 위한 환경이 완벽하게 구축되더라도 코로나19 종식 이후까지 전면적인 비대면 강의가 지속될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 같다. 비대면 강의 비중이 높아지고 각종 첨단 기술로 무장한 강의의 질도 현저하게 개선되겠지만 ‘블렌디드 러닝’과 같이 대면·비대면 혼합 방식이 대세를 이룰 것으로 예상된다. 정보통신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반드시 대면을 해서 교감해야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많기 때문이다.

정보통신기술 발달 초기인 1980년대에 도시가 쇠퇴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심각하게 있었다. 비대면으로도 원활하게 의사소통이 이뤄질 수 있다면 굳이 복잡하고 인구밀도 높은 도시라는 좁은 공간에 모여 살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있었다.

반면 비대면으로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해도 정말 중요한 일은 반드시 만나야만 해결할 수 있고, 이게 더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실제로 실리콘밸리에서 정말 중요한 정보는 공적인 회의가 아니라 사적인 모임에서 얻는 경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결과는 지금 보는 것과 같은 지속적인 도시의 번창이다.

사람들이 직접 만나서 하는 정서적 교감이 중요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실례라고 하겠다. 독일 사상가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의 관계와 ‘나와 그것’의 관계를 구별해 말하고 있다. 전자는 내가 나의 모든 인격을 기울여 상대방을 대하는 것인 반면 후자는 상대방을 그저 피상적인 대상으로만 대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지만 인생이 온통 ‘그것’만으로 차 있다면 참된 나를 찾을 수 없다. 비대면으로 맺은 관계에서 허전함을 느끼는 이유는 비대면이 ‘나와 그것’의 관계로 이끌기 때문은 아닐까.

진정한 상호 교감의 토대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사회의 생산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개미》에서 1 더하기 1이 3이 될 수도 있고, 0.5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더듬이와 더듬이를 직접 맞대고 완전한 소통을 하는 개미는 3이 되지만 단순히 머릿수만 모아 놓은 군중은 0.5가 된다는 것이다.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은 사회적인 공동 작용이 가능한지, 즉 사회적 공감대가 어느 정도인지 여부다.

사회 구성원 사이 공감의 폭과 그 바탕 위에 쌓인 신뢰의 크기가 그 사회의 생산성을 결정한다. 세계 모든 국가의 새천년 비전에 예외 없이 사회 통합이 들어가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